서현역 . 광장에 개 한마리
Yellow K228






새벽 . 지하홀 긴의자에 쇼핑봉투 .. 은빛 포장 바구니와 함께 ...
물순이와 팔자가 모로누워 졸고 있다 ... 불과 두 정거장 거리의 전혀
물 다른 동네에서 원정 온 그녀들의 짧은 치마 아래로 ... 속을 비운
첫 전철이 밀어낸 ... 묵은 바람이 한바탕 지나가고 ...

오리발 수서행 지하철 ... 의미를 토막낸 단편영화 같은 노선에서
물순이는 ... 한시간전 뼈다구집에서 해장 씹을 유혹하던 말코를 잠시
떠올려본다 . 집으로 돌아갈때마다 텅 비어버린 것 같은 ... 물순이
모란역에 내리면서 전철표를 흘리지만 ... 그녀의 포장 바구니는
은빛으로 탱탱하게 조명발을 세우는 ....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 ...










백화점이 개시 준비하는 오전 ... 지하 가전매장 티브이마다 특별
기자회견이 뜨고 ... 몇십년동안 가난한 북쪽 나라에서 장사를
독점하기 위해 ... 누가 누구에게 돈을 건넨 이야기를 ... 독점문화에
익숙해진 ... 커다란 건물의 작은 직원들이 보고 있다

그 시간 ... 재탕 아이디어로 머리통만 커진 방송국에서는 ... 독점이란
이슈를 독점하기 위하여 ... 누가 누구에게 사랑을 독점하려 초콜렛을
건네는 날 ... 특집 방송팀을 큰 백화점 전철역으로 급파한다



수서발 6량 전동차 안에서 ... 오늘의 상자를 끌고온 아줌마가 ...
모든 얼룩을 한번에 지우는 약을 선전하며 ... 하얀벽을 닦는다 .
나란히 앉은 점쟁이와 부동산 중개인이 ... 들에 우뚝 탑이 서있고
강물 흘렀던 신도시 음향설을 쑥덕이고 ... 홍제에서 스위스발
초콜릿을 들고온 소녀의 꿈 모서리가 시큼한 공기에 닳아간다

통박과 소망이 한통의 초콜릿처럼 섞인 객차를 나온 그들은
승강장에서 ... 당연히 지나갈 수 밖에 없는 백화점 광고를 미리보기
하고 ... 개찰구를 나오면 ... 두개로 선택이 한정된 벽 앞에 선다 .
식품 또는 비식품 ... 오늘은 특별한 날 ... 식품을 들고 식품 또는
비식품을 기다릴 수 있는날 ... 이분법으로 풀리는 심플 데이 ...
펑 ... 즉석 사진대에서 커턴을 흔드는 플래쉬가 터진다 ...





오후 . 역앞 광장에 방송차가 오고 ... 사랑의 독점에 대해 인터뷰를
진행한다 . '퍼주는게 아니에요 ' '선물 내용은 비밀이에요' '주는만큼
받고파요 ' ... 따위의 어디에선가 반복되던 대답들이 이어지고 ...

가까운 먹자빌딩 청국장 집에서 ... 퇴물 운동선수가 밥을 비비며
티브이로 배구 중계를 본다 . 스카우트를 독식한 불조심 팀이 초라한
비행기 팀을 아작내고 ... 독점에 바람난 치어걸들이 플로어를 향해
엉덩이를 흔들자 ... 퇴물선수 병소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광장에서 퇴물선수가 한맺힌 주정을 하고 .. 방송차에서 테마 음악
볼륨을 높인다 ... 더 위너 테이크스 잇 올 ... 큰 건물의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지는 광장의 활기 사이로 ... 우아한 기품이 출렁이는
코코아빛 개 한마리가 ... 티끌 같은 시선들을 무시하며 천천히
백화점에 들어가 ... 전면홀 프라다 매장 앞에 웅크리고 앉는다



마이크와 카메라와 쇼핑객들이 개에게 집중되지만 ... 개는 중앙홀의
한점만 응시하고 ... 그 곳으로 정시의 뻐꾸기처럼 ... 턱시도의
피아니스트가 나와 연주를 시작하자 ... 매체와 시선들은 개를 따라
음악에 빠져든다 . 톺라이트 아래로 소나타의 은빛비가 쏟아지고 ...

몇사람이 개에게 다가와 털을 쓸어보고 ... 탐할 수 없는 동경에
떨기도 한다 . 브랜드에 취한 고객들은 ...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브랜드의 이미지를 향유하는 개의 정체를 아무도 모른다 . 신비의
우물에서 퍼올린 명품처럼 ... 긴 상속의 이야기가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 개의 주변으로 밀라노발 통신들이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

연주가 끝나고 커턴콜 타임까지 보낸 개가 ... 천천히 걸어나와
광장에서 사라지고 ... 얼마동안 개와 그밖의 모든것들로 나누어지던
허영의 하오에 다시 인간적인 이벤트들이 조수처럼 밀려오고 ...





힘겨운 힐의 여인이 두손 가득 포도쥬스와 요구르트를 들고 대장항문
병원 아크릴 아래를 지나가고 ... 앞치마를 걸친 남자가 팔뚝에
문신한 여자에게 금빛 하트를 선물받고 ... 방송 마이크가 다가오자 ...
뜬금없이 '자유'라는 한마디를 던진다 . 이매와 서현 출신으로 나누어
당구장에서 패싸움하던 고딩이 절룩이며 꽃다발을 끼고 가고 ...

맥도날드 앞에서 ... 열살 소녀가 방송 마이크에 남자친구를 향해 ...
칠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를 외치자 ... 음악이 아이 자스트 콜 투 세이
아러뷰로 바뀐다 . 술깬 퇴물선수가 비칠거리며 전철역으로 들어간다
그에게 언제나 운은 비껴가기만 했지만 ... 수서역에 도착하면 ..
깨끗이 빈 전철이 한편의 전환처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녹화를 마친 방송팀은 사소함을 진지함으로 부풀릴 잔머리를 굴리다
개마저 인터뷰하려 했던 열정에 스스로 감동하며 떠나가고 ...
재빨리 잊는 속성의 포동포동한 살집들이 ... 다시 광장을 채워간다



새로 채운 또 한잔의 밤 . 핑크빛 악어가 수놓인 털모자의 물순이
승강장에 내리고 ... 갈망의 디테일로 가득 채워진 초콜릿 바구니
팔에 끼고 ... 출구를 빠져나온다 . 이 밤이 가기전에 말코 또는
개코에게 그녀는 바구니를 선물할 것이고 ... 몇박자의 리듬이 얽힐
것이고 ... 몇방울의 체액이 섞일 것이다 . 어찌 되었건 이 동네의
상자속에 그녀는 남아있고 싶다 . 새벽 전철의 지랄맞은 기분은
내일의 일일뿐 ....... 물순이 발광에 뒤척이는 광장에 선다



밤이 게워낸 쓴물의 새벽 . 말라붙은 정액 같은 겨울 보도블럭 위로
코코아빛 개의 우아한 발이 토닥토닥 걸어와 ... 두시간전 물순이가
말코의 배신에 떨던 해장국집 쓰레기통에서 ... 뼈다구 하나 줏어물고
일을 마친 청소부 할배 옆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한다 .

새벽 꽁초의 깊은 맛에 빠져있는 할배는 ... 개를 쓰다듬는다 . 그는
자신의 개가 낮에 어느 물에서 노는지 알지 못한다 . 다만 자신처럼
외로운 개의 ... 눈동자가 가끔 먼데를 바라보는 것처럼 텅 비어가는
느낌이 든다 . 개가 그의 담배에 찌든 손을 가만히 핥는다

타버린 시간의 재가 채 쌓이지 못한 여린 광장에 찬바람이 불고 ....
서로의 연민에 그윽한 눈동자로 마주보는 개와 사람 위로 .....
너무 늙어 버렸지만 언제나 새로워 보이는
태양이 떠오른다









2003 . 2. 24
tkhong .  letter@ange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