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빙고역 . 비오는날 전화
Deep Blue K130


"비 오는 날에는 서빙고역에 가 ..... "
계절이 스무번쯤 지나간 후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빗물 스민 벽지 ... 마른 멸치 .... 빈 소주병에 컬러가 피어나고
남은 잔을 밀치고 그는 일어섰다

용산과 이촌 사이 . 한산한 전철이 몇사람을 뿌려놓고 가고
강에서 멀지않은 승강장에 무료한 비가 내린다
정류장 표지판의 박람회풍 폰트에 무거운 국철풍 습기가 깔리고 ...
우수 파이프 빗물리듬으로 .... 스피커에서 디제이가 웃음을 쏟아낸다








그해봄 . 그는 시간당 이천이백원짜리 단순입력 일을 했다
돈이 생기면 우선 질좋은 키보드와 알찬 꽃게를 살 목표와 .....
강바람 같은 허영이 남긴 했지만 빈강 처럼 울림이 없는 나날이었다
술잔에 송사리 한마리를 키우며 집 앞 솔밭 나들이가 전부인 그에게

그녀는 서빙고역에 가자고 했다 . 가는 비가 내리던 오후
낡은 흑백영화 속으로 들어왔구나 .... 그런 플랫폼이 있었다 .
길하나 너머 무거운 붉은 벽돌집들과 담장에 기대있는 노란꽃
수용인원이 제한된듯 .... 후렴없는 사랑노래처럼 신산한 승강장 ....

정액권 한장으로 남은 두사람이 나란히 ..... 파란의자에 앉았다
"내 친구가 알바이트하는 우동집에는 국물에 카레를 넣는대 .."
그는 조그만 전철역이 우동국물에 들어간 카레 .... 같다고 했다
하릴없이 비대한 아파트 자락에 자리한 마이너키의 역

빈 철로 위로 디젤기관차와 시멘트 차량들이 지나가고
스피커에서 낮게 돈깁슨의 '상심의 바다'가 나오자
도시에 떠밀려온 조약돌들이 노래를 따라불렀다 . 아웃사이더의 소풍
시간을 빗금으로 차단하는 빗물을 보면서 ......








그는 승강장 끝에 선다 . 허무는 장마철 습기처럼 따라다니고
단층의 옛 역사 벽돌집앞 뜰에 들꽃이 빗물에 고개를 들고서있다
술취한 우울함의 그가 화단옆 철로변에 서있자
역무원이 올라가라고 손짓한다 . 초등학교 뜰 같아요 ......

화장실 스피커에서는 무향의 디제이가 웃음을 찔끔거리고
코를 치켜세운 앵글로섹슨 여인이 스쳐 지나간다 .
혼재하는 주법에 .... 어긋나고 헐거워진 템포의 블루스 풍 역 ....
뒤편에는 초록빛 화물기차 옆에 폐타이어 더미가 있고

육교위에서 사방을 휘둘러봐도 술집이 보이지 않는 백그라운드
남행 선로위에 떨어져 있는 빨간 신호기를 보는 그에게 .....
빗줄기 사이로 몇가닥 남지않은 기억의 사선이 흔들리고
픽션처럼 떠올린 전화번호에 목소리를 ......

엔딩 시그날 같은 경보음과 함께
성북행 전동차가 불을 반짝이며 밀어내고 지나간다




그녀는 육교위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을 보고싶었다
철망이 반만 쳐진 육교 ..... 추락 불가에서 가능한 구역으로 지나가며
"암 오너 브릿지 투러 신동아 아파르먼 " 탑 앤 팬츠 걸의 통화가 스치고
그녀는 전화기를 꺼내들고 불이 들어오는 승강장을 내려다본다








그해봄 . 그녀는 시간당 삼천삼백원의 트럭회사 전화교환일을 했다
돈이 생기면 재규어 무늬 샌들과 영화제 티켓을 살 목표가 있었지만 .....
흐르는 강물처럼 변화없는 일상과 강바닥 처럼 어두웠던 어느 오후
서빙고역 담장의 눈부신 꽃밭에서 시간이 멈추어버렸다

오전에 마치는 일과후 승강장 플라스틱 의자에서 그녀는 수를 놓았다
꽃색깔의 실로 곰과 꽃 .... 그의 이름 따위를 짰다가 풀어가면서
리틀야구단 꼬마들과 롤러블레이드 소녀와 친해졌고 ....
망각을 유혹하듯 빛나던 꽃밭위로 해가 기울면 승강장을 떠났다

첫 보름치 일당을 털어서 그녀는 한병의 꼬냑을 샀다
..... 꼬냑빛 하늘과 꼬냑빛 이십대와 꼬냑빛 전철역을 위하여 .....
점심값과 버스비를 잘라모은 술은 금방 그녀의 뺨을 붉게했다
빨갛게 가라앉고 검붉게 사라지는것을 위하여 .... 가난한자의 허영으로

서빙고역에 왔다 . 승강장 파란의자에서 비를 보며 그는
커피잔에 연유가 풀리는 순간이 기억난다고 했다
"스며들어서 하나가 되는거야 아무 소리도 없이 .... "
벽돌집의 작은화단 .... 빨래줄에 철도원의 수건 .... 자전거 ...

그녀가 보내던 시간의 한줄기를 그는 몰랐다 ... 이 의자에 앉아
한달 일당을 지갑채 다 잃어버렸다며 낙담하던 그의 전화를 받았었고
"이제 지쳤어 ... " 라고할때는 화단에서 시든 꽃을 보았다 .... 그때마다
스치고 잊히는게 정류장이라면 ... 지금 얼마나 온것일까 그녀는 궁금했다








승강장에 불이 다 들어왔다 . 그녀는 이렇게 늦게 머물러 본적이 없었다
마치 언젠가 짧고 희미했던 영화 한편의 디렉터스 컷 처럼 ....
낯선 황홀함보다 낯익은 편안함에 고개를 돌리게된 그녀의 시선으로
불빛들이 지난날 수놓았던 색실들을 하나씩 풀어 놓는다

푸른빛 승강장 ... 오렌지빛 계단 .... 짧게 스치는 초록 신호등
단층 역사 쪽 철로에 빨간 신호기가 떨어져 있다 .... 빨간색 상실 .....
올리비에의 빨간모자 ..... 그가 좋아하던 '내나이 64' 을 흥얼거리며
그녀는 승강장을 한바퀴 돌아온다 . 우리는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지만

우리가 가고싶었던 곳과 우리가 머물던 곳은 너무 달라서 ....
승강장의 끝에서 끝까지 걸으며 노래를 따라불렀었지
"- 내가 늙고 머리가 빠져도 발렌타인날 와인 한병 보내줄래 - "
기차가 다니지 않아서 .... 불이 들어오지 않는 잊혀진 선로

그는 그 맨끝 승강장을 좋아했다 . 비는 여전히 시간을 붙잡고 있고
높고 낮은 두개의 역사 . 육교 . 계절꽃 화단 .... 변한건 하나도 없다
상영중인 극장문을 막 열었을때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스크린의 역
만남과 헤어짐의 중간쯤에서 정지해버린 승강장에서 .....

그녀는 잊혀진 드라마의 토막난 크레딧처럼 떠오르는 전화번호를 누른다
발신음같은 경보와 함께 성북행 디젤 기관차가 지나가고
오래전 풀어둔 색실이 날아와 전화기 마이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 비 오는 날에는 서빙고 역으로 가 "






2002 . 7. 16
tkhong .  letter@ange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