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역 . 2092 돌아온 메시지
Orange 337


굵은금이 간 돌벽 .. 껌뻑이는 표지등 ... 빗물 새는 지하통로에서
시드루 바지의 소년이 교차홀을 지나 노란 램프의 입구로 들어간다
내버린 어둠에 묻힌 이곳은 ...... 폐쇄된 옛 전동열차 지하역이다 .

이끼 덮인 벽면 가운데 .... 모니터에서는 지역사 방송이 나오고
- 2046년 그랜드 재개발 . 아구찜과 지터벅 타운에 새물결 ....
따위의 자막이 지나간다 .... 죽음처럼 깊고 고요한 통로 ....

긴 의자에 벌렁 누운 소년이 .... 리모트 버턴의 연대를 뒤로 조정하자
모니터속의 풍경이 조금씩 과거로 돌아가면서 ...
소년은 눈을 감고 이끼 냄새를 폐속 깊이 들이키며 ... 긴 날숨을 뱉는다









- 100년전 ...... 이미지와 음악 ... 순수와 낭만 .. 약속과 열정 ..
- 신사역 ..... 스테이션 오브 젠틀맨 ....
- 오렌지라인이 역에 도착하면 .....

소년의 생각들이 기계문자로 바뀌어 이식된 전뇌로 흘러들어간다

- 군복의 남자들이 새틴 드레스의 여인들과 쏟아져 나오고
- 강을 따라 은빛 퍼레이드가 밤마다 이어지고 리듬의 향기 날리던 ....
- 단지 백년전이야 ..... 꿈들이 쏟아지고 있었어 ....

소년이 손을 쳐들고 손바닥의 모니터를 보면 찍히는 정보 응답

- 네개의 섹터 ... 섹터 하나 . 해물요리 ... 멸종된 물고기들
- 섹터 둘 . 강변호텔 .... 섹터 셋 . 카바레 .... 섹터 넷 . 영화관 . 포장마차
- 푸 .. 첫사랑 카바레 .... 식물원에서 본 목련 같아 ....
- 카바레 ..... 새벽의 레모네이드처럼 ..... 가벼운 열정 ....
- 포장마차 ..... 도시에서 사라진 말을 그리워한 바 .....

- 그리움과 상징만으로 가상의 무대가 만들어지던 시대
- .... 하늘에 별이 있고 길에는 나무가 있고 핑크와 블루 네온 ...

모니터에서 팅 - 소리가 나고 .... 소년이 돌아보면
잠원 . 신사 . 압구정 ...... 기념비 표시등 촉수낮은 불빛 아래로

레일이 끊어진 터널속에서 20세기식 펜슬룩의 소녀가 걸어나오고
얼음장 표정에 .... 목걸이의 통신 램프 반짝이며 .... 벽면 모니터를 바라본다
소년이 소녀를 보며 중얼 ......... 푸 .... 심각한 메모리족이야 ..



- ..... 여기는 지금은 잿더미지만 백년전에는 쓰레기더미였어 ...
소녀는 가늘게 입술을 움직이며 노트를 하고 있다
- 생선 아가미와 갑각류의 껍질이 썩는 냄새가 강바닥을 타고 흘렀고 ....
- 찌든 성기들이 불완전 연소에 미쳐가며 발악하고 있었어

- 길게 이어온것들은 버림받고 .... 토막나고 흩어진 이미지들로 넘치고
- 근처에 흐르던 강물은 폐수처리 기능만 했을 뿐이야 ...
- 강변 호텔에서 길가 호텔 사이에서 .... 잠잘곳을 찾아 헤메던 ....
- 신사 .... 는 식민지 시대 단어야 ....

- 녹빛 스모그도 잿빛 비도 없었지만 길위에는 사랑도 춤도 없었지
- 사람들은 벽으로 막힌 곳을 찾아 ... 이 지하역에서 밤을 기다렸어 ...
- 그들이 침대위에서 쏟아낸 물줄기로 .... 그동안 강은 마를 수 없었겠지 ...
- 한순간 시스템이 펑 .... 나가버렸어 .....

소녀가 목걸이의 채널을 돌리자 .... 혼돈의 시대 랩이 가늘게 흐르고
가방에서 헤시시 캡슐을 꺼내 길게 한모금 빨아들이자
눈가에 10CC쯤 물이 비친다
- 깊은밤 뜨거운 초콜렛 .... 지겹게 반복되던 굴레 ....
- 강바람은 지독한 풍화로 지치게했겠지 ....



틈새마다 뿜어내는 빗방울로 번들거리는 지역사 모니터 화면이
2002년에 멈추면서 .... 시뮬레이션 이미지로 바뀌고
- 4월 ... 통신 기록중에서 .... 어느 여인의 메시지 ...
90년전 지하철역 승강장 풍경이 어슴프레 그려지며 ..... 자막

- 남편은 곧 풀려나올것 같아 ....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
- 아무것도 확신이 서지 않아 ..... 다시 신사역에 그냥 내리고 말았네 .... 휴 ..
- 8번출구에서 기다리께 .... 나한테는말야 .... 여기에 오면 ...


- 한심한 할머니 ..... 기다림은 썩기전의 거품이란걸 몰라 ...

소녀가 승강장으로 올라와 출구 표시등을 따라걸어가고
마주 오던 소년이 소녀를 보고 손을 흔들지만 소녀는 외면하고 지나친다

3호선 기념관 통로를 나와 .... 미끈거리는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는 소녀
지상으로 나오며 .... 옷겹에서 후드를 꺼내 쓴다 .... 줄기찬 비 ...
- 100년이 넘게 이곳은 거짓말 뿐이었어 ....
- 배반하고 추락하던 사랑 군상들 ..... 멸종되어 버린건 잘된 일이야 ....

소녀가 클라식 야마하를 타고 .... 잿빛비 끝없는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 .. 푸 ... 더블 판타지 ....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무심코 내리던 역 ..
소년이 위스키 대롱을 꺼내 흔들고 .... 거품을 불며 옛통로를 빠져나간다
거품방울들이 빗물 튀는 유리천정면에 맞닿아 .... 하나씩 꺼지고
텅빈 옛 전철역에 ..... 홀로 돌고 있는 지역사 모니터 영상 ..









화면은 점점 지난 시절의 풍경에 실사처럼 가까워지고
대하발 전동차에서 내린 검은 슈트의 여인이 통로를 걸어나온다

- 난 여기에 오면 .... 변해가는것들 안에 서있다는 느낌이야 ....

여인이 출구를 나온다 .... 맑은 봄날 깊어가는 저녁 풍경
- 여기는 그대로 머무는게 없어 .... 모든것들이 차례로 소멸되면서 ...
- 내가 늙어간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려 .... 나란히 달리는 두개의 열차처럼 ....
- 시간이 정지해있는 느낌 알지 ........ 그래서 뭔가 붙잡고 싶어져 ....

리시버를 끼고 고개를 까닥이는 남자가 여인과 스치며 통로를 내려가고
지하홀에서 에나멜빛 원피스 여자가 마주오자 함박 미소를 짓지만 ....
차갑게 담담한 에나멜녀는 강변쪽 출구를 빠져나간다

땅밑에서 수서행 전철이 터널깊이 빛을 다물며 달려나가고 ....
지상에서는 한차레 노랑모래 바람이 일고 ...... 어둠이 내려오는 거리에 ....
막 의자를 밖에 내놓는 포장마차에 백열등 밝혀지고
신호등이 바뀌자 .... 퀵서비스 오토바이가 시간을 밀어내며 튀어나간다
캬바레 빌딩 옥상 전광판에 .... 회색비 내리는 도시가 나오면서 .......








지역사 모니터에는 ..... 화면이 바뀌며 ...... 2001년으로 넘어간다 .
유리천정에서 새는 비가 스프링쿨러처럼 퍼져나가고 ....
옛날 레일이 있던 자리에 찰랑이는 잿빛 흙탕물이 .....
터널 깊이 어둠속으로 흘러간다



2002 . 5. 3
tkhong .  letter@ange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