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동역 . 빨간 선을 따라서
주홍 11





비는 지하철 승강장 벽 이미지를 보고 깜짝 소리를 지를뻔했다 .
이건 그 지도야 ... 친구가 고개를 쯧쯧 고개를 흔든다 . 비가 새벽에
카페 계단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 친구는 믿지 않았었다 .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벽면에 붙은 빨간 구조물을 보면서 ...
어제밤의 기억이 슬라이드처럼 또렷이 지나간다 .



비는 화장실 계단을 내려오다 한번 휘청였다 ... 그만 마셔야지 ...
계단벽에 나란히 붙어있는 낡은 포스터를 보다가 ... 70년대 날짜가
적힌 누렇게 바랜 락 페스티발 포스터에 손을 대자 .... 삐익- 벽체가
움직이면서 ... 빛이 새나왔다 . 약 먹는 애들 방 ? ... 레몬빛 램프가
있는 벽 안쪽으로 비가 들어가자 ... 까만 거울벽 작은 방 ......

은회색 바 안쪽에서 올리브빛 자켓 여자가 비에게 눈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 가을호수 같은 마티니를 홀짝이며 ... 잔받침과 성냥에
그려진 이미지를 비가 물어보았다 ... 그건 지도였다 . 비가 바를
나와서 올리브 여자가 설명해준 지도의 빨간선을 따라간 ... 거리는
영화제 때마다 왔던 곳과 달랐다 . 화려한 유턴을 한 것일까 ......

비는 단팥 아이스케잌 전문점에 갔었고 ... 글렘락으로 촉촉한
레코드점 ... 스틸레토 하이힐 구두점 ... 지도가 가리키는 곳마다 ...
처음본 스타일 숖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 마치 ... 패션의 늪지에서
이끼가 네온으로 발광하는 ... 모던시대의 클라이막스 모드 같았다

지도의 사선 부분 ... 언덕길에는 생선구이 집들로 들어차 있었다 .
고등어 장어 연기 자욱한 길목 까마득한 계단을 올라가 ... 구름다리
옆 카바레에서 캄보밴드의 탱고를 들으며 ... 꿈이 아닐까 했지만 ...
영화제 팸플릿이 여전히 한속에 꼭 쥐어져 있었고 ...

향촌 무아 귀로 ... 흑백 영화속 같은 아크릴 불빛의 길지 않은 길을
걸었고 ...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며 ... 씨에프 한 토막 같다는 생각을
했고 ... 비어홀 금메달에서 라틴 엘레지 밴드와 ... 가슴에 번호표를
단 여자들을 보면서 ... 발간 밑불이 재로 변해가는 캠프파이어의
끝물 같다 느꼈던가 .......... 카페 계단에서 잠을 깼을땐 ... 계단
창으로 넘어오는 새벽빛에 ... 낡은 포스터 자국만 벽에 남아있었다










비는 승강장 벽을 마주보며 홀린듯 서있었다 . 노란 금박을 벗겨낸
지도에 빨간색 선을 따라 지난 밤의 불빛들이 피어있는 것 같았다 .
부산역 방향 전철이 몇번 지나가고 기차시간이 다가오자 ....
친구는 비가 린 램지의 '모번 칼러'와 기타노 다케시 '돌즈'를 보더니
로드무비병에 걸린거라고 화를 냈다 .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 ....

비는 친구랑 헤어져 지하도를 올라왔다 . 상심한 11월의 먼지 바람이
불어오는 거리는 무대를 바꾼 것처럼 변해있었다 . 레인코트 남자가
계단에서 담배 피던 은행건물이 사라지고 ... 수제화점이 속옷가게로
바뀌었고 .. 아이스 케잌집은 흔적도 없었다 . 할매집에서 회국수를
비벼주던 할매를 찾자 .. 아줌마가 연민 출렁이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무데도 남아있지 않았다 . 구두점들은 어디로 갔을까 ... 레코드점 ...
비어홀 ... 나이트클럽 ... 낡은 시집 제목 같던 간판들은 ... 안개 유리
불빛은 ... 피아노의 목조 카페는 ... 크림빛 빵집은 ... 계단옆 바는 ...










희는 바우하우스 의자 커피집 통유리창으로 비를 보고 있다 . 옆자리
남자의 담배연기가 천정 패널에 닿는 시간 동안 .... 희는 비에게
지도를 보여준게 잘못이었을까 ... 생각해봤다 . 천정을 타고 한줄기
연기가 커턴박스로 퍼져나갔다 . 어차피 ... 그 바에 들어온 사람은
노스탈지어 마티니에 배니티 올리브를 곁들이고 영원히 두개의
시간대에 머물 운명인걸 ... 1cc 담배연기와 함께 희는 찻집을
나왔다 . 이 거리를 떠날 수 없는 사람들속에서 살아가야겠지 ...

알마니를 걸치고 노점 오뎅을 먹는 남자 옆으로 희가 다가간다 .
그는 ... 명품 정장 차림으로 노점상이나 ... 가판대 주변에서 하루를
보낸다 . 누군가 뭐하냐고 물어보면 그는 언제나 '바이어를 기다리고
있다' 거나 ... 때로 '바이어를 만나러 가는길' .. 이라 한다 . 언제나
혼자인 그 ... 옆으로 바퀴가방의 가죽 슈트 남자가 지나간다

가죽슈트는 구두방을 하다 망하고 이혼 당하고 ... 페리보트에서
보따리 장사를 하고있다 . 배가 없는 날이면 그는 ... 가방을 굴리며
거리를 종일 돌아다닌다 . 가방 안에는 그의 가재도구가 들어있다 .
바퀴가방이 지나가는 좁은길에 .. 재클린 선글라스 여자가 서있다 .
그녀는 언제나 오래된 레코드숖 스피커에서 클래식을 듣는다 . 숖
주인은 그녀가 안보이면 ... 생리일이라 짐작할 뿐이다

냉면집 앞에 개를 들고 있는 여자아이는 ... LPG 사고로 폭발한
레스토랑 카운터와 주방에서 엄마 아빠를 잃었다 . 누구라도 하루치
개먹이와 냉면값이 있으면 이 아이와 잘 수 있지만 ... 아이는
한발짝도 이 거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 아이와 친하면서 잔 적 없는
유일한 남자인 ... 대머리는 아나고 배의 게이 선원으로 낮술 한잔
마시면 ... 아무 남자에게나 다가가 부드럽게 붕알을 쥔다 .
낮술대머리를 모르면 ... 엉덩이가 말랐거나 ... 이 거리 남자가
아니라고 보면 된다 . 붕알을 쥐는 순간 ... 여자아이의 응어리를
토해내는 귀기 서린 폭소와 덩달아 개짖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대머리가 낮술 마시는 잔술집 ... 다른 테이블에서는 세리니 머플러의
여인이 데운 정종을 마시고 나와 ... 지하철역 8번 출구를 지나 ...
찬바람 부는 구 영도다리 난간에 선다 . 모조 샤넬 핸드백 깊이
숨어있는 모조성기를 꺼내고 ... 귀두자리에 십밀리쯤 립스틱 자국을
남기고 바다에 던져버린다 . 오랜 세월 그녀가 천개 가까이 성기를
던졌지만 ... 다리아래 물은 불어나지 않았다 . 아무도 그녀에 대하여
몰랐지만 ... '무엇이든' ... 버릴것 같은 그녀의 느낌에 취하곤 했다

잔술집이 있는 허술한 골목 담벼락 포장좌판에는 ... 끈떨어진 샌들의
여인이 물국수를 먹고 있다 . 그녀는 관록의 댄서로 ... 이 거리에서
끈떨어진 샌들을 모르는 날라리는 없다 . 나이트 클럽에서 애인에게
채이고 ... 혹은 춤이 씹히고 ... 샌들 끈을 잘랐다는 ... 그녀에 대한
소문은 여러 갈레가 있다 . 샌들의 옆에 희가 다가와 앉았지만 ...
누구도 희를 볼 수 없다 . 그녀는 삼년전에 사고로 죽었었다

희는 밤이면 ... 오래전 남자친구를 바람 맞힌 바가 있던 자리에서
어제처럼 시간의 계단을 헛디딘 손님이 오면 ... 한 잔의 마티니와
꿈의 거리 지도를 보여준다 . 외로운 허영의 손님들이 늘어나고 ...
지하철 승강장에도 지도가 새겨지게 되었지만 ... 남자친구는 거리에
보이지 않았고 ... 희는 자신이 조금씩 향수 짙은 칵테일로 변해가는
것을 알고 있다 . 다른 모든 거리의 유령들이 그랬던것처럼 ....










비는 노점상 핫초콜렛을 마시고 있다 . 몇군데 노점을 지나오면서 ...
주인들의 이야기를 맞춰보면 ... 비는 어제밤 삼십년전으로 돌아갔던
것 같았다 . 본적도 볼 수도 없었던 장소가 실제 있었다니 ... 떨리는
목에 뜨거운 음료를 넘기는데 .... 앰프 사운드 들리고 .....

어제밤 나이트클럽이 있던 건물앞에서 오프닝쇼를 하는 이벤트걸이
클럽에서 본 여자랑 옷도 춤도 꼭같다 . 미쳤어 ... 아취로 장식된
풍선더미에서 ... 노랑풍선 하나가 하늘로 올라가는걸 보며 ... 비는
문득 ... 처음 영화제를 보러 왔던 해부터 .... 영화보다 이 거리에
빠져있었고 ... 한번도 와본 적이 없던 어릴때부터 ... 꿈속의
배경이었다는 ... 기억이 또렷이 다가온다 . 노랑풍선이 사라지는 ...
운명처럼 까만 밤하늘 아래 ... 가로등이 물속의 빛처럼 반짝인다

전철역으로 내려오면서 ... 비는 학교를 그만두고 이 거리에 내려와서
개길 결심을 한다 . 영화를 만들 꿈은 꿈꾸던 거리에서 이루지 뭐 ....
... 바의 그 여자가 그리웠다 . 올리브빛 매니큐어를 사야겠어 ...
화장을 짙게하고 ... 바텐더를 해보까 ... 즐거워진다



승강장 벽의 지도에는 비가 지나온 빨간선 길에 빛이 흐르고 ... 깊은 암호를 간직한 배경과 승객들의 곁으로 ...
어둠속에 오래 머물었던 바람을 밀어내며
부산역 방향 전철이 들어왔다

막 출발하는 전철 유리창으로 비는 ....
한줌의 올리브 빛을 본다

승강장에서 전철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희가 .....
손을 흔들고 있다

2003 . 1. 31
tkhong .  letter@ange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