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여대역 . 언덕으로 가는 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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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역의 풍만한 곡면 승강장에서는 가임의 체화를 떠올릴 수도 있다
괄호 속에 묻힌 이름의 동네에 내리며 그는 하얀빛의 수녀님을 본다
위스퍼 워즈 옵 위즈덤 ..... 분위기를 각색하듯 개찰구 휴게석
벽에는 채색유리가 덮여있고 ... 토막내 끌어쓴 어색한 유리면은
쌍으로 양끝벽에서 마주보며 서로 위로하고 있다




정품팬티 . 프렌취키쓰 . 교환불가능 . 삼단우산 이천오백원 .
열대식물 뿌리주스 . 단밤코너 ... 나직히 가라앉는 정오의 짧은 홀
3번 출구 계단참의 마트는 ... 아코디언 타잎 매장이다 . 들어가면
한바퀴 돌아 맞은편으로 나오는 구조에 ... 그는 자신의 처지를 닮은
공간 자각으로 탄복한다 . 시점과 종점이 거울 같은 팔자 ...

누워있는 가로수처럼 가지많은 길을 따라오면 ... 포 스트롱 윈드
네거리에서 고갯길쪽 옛빵집 건물은 아랫도리만 돌껍질 케잌
모양으로 서있다 . 희미한 옛사랑 그림자를 뒤로 .. 학교 길에 오면 ...
지하역에 아쉽던 빛이 싸라기로 밀려와 ... 24K의 환장과 14K의 통박 ..
인조진주의 꼴림과 커플링의 멀미로 떠다닌다

그는 오백원짜리 묽은 소프트크림에 혀를 박고 거꾸로 선 견본 그물
스타킹과 쫄엉덩이와 무빙브라 스트립들을 본다 . 성형할 수 있는
건물들과 조형할 수 있는 리어카들 ... 심플마인드의 능동형 피조물들
카디건을 걸친 한무리 여고생들이 떡볶이를 문 이빨에게 손 흔들고 ...
짧게 사라진 묵은 음반 카페 자리를 지나 ... 텔레콤 빌딩 가로수
밑에서 그는 몇 개의 너덜해진 기억들을 지운다








프레임만 남아있는 오래된 길목을 건너 시장으로 넘어오면 ...
뿌리내려 살다간 밥집 할머니의 운명에 ... 가게마다 몇 개의 신비한
다큐멘타리를 릴레이하고 있다 . 생닭도 햇밤도 살 일이 없는 그는
뒷골목으로 들어온다 . 좁은몰 깊이 박공형 지붕 구멍사이로 회고의
빛이 스며드는 길에 셔터내린 문들 ... 버린 마네킹의 정적으로 ...

휠체어가 지나가고 ... 유리문안 모직 걸개 산수화와 한복 옷고름 ..
갈데없는 가구와 문짝 고무물통 아크릴 입간판 ... 시절버스 뒷칸에
부유하는 것들 사이에는 못다한 속절들이 떠다닌다








2
오후 세시 감자탕집 . 구석에서 말쑥한 정장과 점퍼의 어린 남자들이
취해있다 . 테이블 위에 가득 흔들리는 소주병 ... 술하얀 얼굴로
"아버지는 당연히 포함되지 ..." 갓 취직한 그들은 의료보험의
혜택에 대해 한시간 가까이 반복 감동하면서 .... 대낮에 비워낸
술병수와 가족건강 책임의 동지감에 겨워 목이 메인다

가운데쯤 자리에는 중년의 캡과 뻗친 직모가 벌겋게 마시고 있다 .
"가오다시라니 말조심해 " "형이 술값만 칠백만원씩 쓴다니 하는
말이죠" "너 노래방에서도 마이크로 내머리 수십번 쳤쟈나 .."
"다섯번이에요 형" "만원짜리 하나 있슴 이 술값내고 나가 !"

한자리 떨어져 그는 소주를 마시며 ... 깍두기 국물 번진 신문을
본다 . 생애의 절반너머 홈리스로 떠돈 그는 아파트 분양 전면광고
모델 얼굴에 묻은 국물자국을 손톱으로 공들여 긁어낸다

다섯 남자의 시선을 받으며 그녀가 들어와 입구 끝자리에서 작은
감자탕과 소주를 시키고 ... 술잔과 핸폰과 수저를 나란히 놓는다



그들은 지금 모르겠지만 언젠가 전철안에서 .... 오바로꾸맨 캡은
사타구니를 그녀의 바지에 부비고 역 화장실에서 흐린 자위를 했고 ...
직모는 휴대폰으로 아내의 죽음을 듣자 .. 옆에 서있던 정장의 어깨에
휘청 기댔었고 ... 그는 점퍼에게 태극당이 어디쯤이냐고 물었었다

다산의 이모 같은 옛동네에는 언제나 있음직한 인연들이지만 그들은
서로를 테이블 속성만큼 닫아둔다 . 오래 끓인 뼈국물 같은 과거와 ..
익은 감자로 지친 현실에 ... 엇비슷한 김이 피어오른다



3
네거리에 불빛이 들어오는 저녁 . 망설이던 그녀가 전철역으로
내려가지 않았다면 ... 언제나처럼 맞바람의 힐 스트리트 블루스
고갯길을 올라갔을 것이고 ... 어두운 복도끝 일곱평 안에서 ...
재건축과 재회와 재수 따위의 .. 하루치 기다림을 펼쳐 놓았을 것이다

언덕길에는 경사없는 행로를 위해 ... 늘어선 점집들이 있어 ... 오를때
몇조각 기대의 유혹을 받고 ... 내려올땐 가속되는 황폐함에 외면하고
말았겠지 .... 드라마 없는 일상에 오르가즘 없는 고개를 넘었겠지


그는 역 승강장 의자에서 졸았고 .... 꿈속에 열여섯살의 그가 나왔다
첫번째 가출의 한겨울 . 미아리 고개가 얼음판이 되어 ... 오를 수가
없었고 ... 시장통에 와서 감자탕집 아궁이에 곁불을 쬐다가 ....
여섯살로 돌아가 ... 옛날 전차를 타고 ... 네거리를 지나 크게 회전한
전차가 고갯길을 올라가며 ... 꿈이 아닐까 걱정한다 .









승강장 끄터머리에 정장과 점퍼가 휘청이는 몸을 껴안고 신음처럼
의료보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 공중전화가 있는 벽돌벽 알코브
바닥에 캡이 길게 누워있고 ... 옆에는 직모가 종이컵을 코위에
올려놓고 중얼대고 있다 . 긴의자의 그녀는 턱을 괴고 생각에 빠져
있는듯하고 .... 어디선가 재건시대의 그리운 종소리가 들리며 ...

지하역의 낮은 천정이 열리고 ... 짙푸른 유니폼 기사의 한량짜리
옛전차가 들어와 ... 픽- 김빠지는 소리와 드르륵 문이 열리자 ...
그와 정장과 점퍼 .. 캡과 직모가 기다린듯 오르고 .. 눈 비비던
그녀와 하얀빛 수녀님이 타고 ... 승강장에 잘린 노래가 들렸다
... 데어 윌 비 어 엔서 ... 딸랑딸랑 전차는 떠나면서 길게 ...

굽이진 회전을 하고 언덕길을 올라간다 . 점집의 깃대가 흔들리고 ...
그는 창 밖에 고개를 내민 여섯살 자신을 만나고 .... 그녀는 언덕위
작은 아파트 삼층 끝방 창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본다 .
그리움 창가의 사람들을 실은 전차가 언덕을 오르자
다음역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4
지하 전철역에 밤이 깊어가고
그들은 결코 알 수 없겠지만 ...
언젠가 감자탕의 김처럼 스쳤던 여섯 사람들이
승강장의 속성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꿈을 꾸고 있다

2002 . 9. 27
tkhong .  letter@ange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