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역 . 스크린 유령들의 비상구
blue 423



바람을 맞는건가 ..... 마지막 전철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J와 휴가기간 동안 단편 비디오를 만들기로한 첫날 ... 자정 ...
돌아가기도 이미 늦어버린 시간 .... 썰렁하게 빈 출구앞에
한차례 깊은 바람이 불고 ... 묘한 옷차림의 남자가 다가왔다

아래위 스무개쯤 달린 주머니마다 .... 종이뭉치가 삐죽 나와있고
줄곧 무언가를 기록하며 걸어가던 남자가 ..... 힐끔 나를 보더니 ...
"시나리오 살랍니까 ? ...... 장르별로 완벽한 줄거리 다 있습니다 "
고개를 가로 젓자 .... 안됐다는 표정으로 지나가고 .. 출구에는

한떼의 촬영팀이 나타났다 . 걸쭉한 장비를 둘러멘 스텝들의
유니폼에는 '당고개에 두고 온 마음' 이라는 제목이 찍혀있다
촬영 구경하려고 그들을 따라갔다 . 선로에 노란색 전철이
서있고 ... 은행나무 모형이 가로수처럼 줄지어선 승장장에서 ....

전철이 떠나고 낙엽을 밟으며 돌아서는 여주인공 .... 컷 !
놀랍게도 똑딱이를 쥐고 있는 남자는 J다 .. 나를 기다린듯 ...
"이 승강장의 곡면률은 향수 그자체야 .... 멜로물에 딱이지 ... "
황당한 내 눈앞에 .... 미소의 J는 .... 통로방향으로 가보라고 한다







안개 피는 계단에서 돌아보니 J는 사라지고 없었다 . 아래층 ...
동굴천정 승강장에 푸른 네온과 자욱한 안개비가 깔리고
덜컹덜컹 낡은 오십년대 전차에서 ... 건달과 광녀가 내린다
게시판에 '수서행 전철은 벨을 두번 울린다' .... 제목이 보이고

에스컬레이터에서 ... 건달이 광녀를 격하게 껴안고 .... 꼬인채
올라간다 .... 그리크 만돌린 배경음에 난폭한 난간체위 섹스 .....
두사람이 기나긴 에스컬레이트에서 굴러 떨어져 .... 광녀만 죽고
흐느끼는 건달 .... 수서행 승강장에 피가 번져가고 .... 상승하는

트랙아웃 뷰로 음울한 사랑의 마지막 장면이 안개에 묻히고
동시에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요란한 박수소리가 쏟아진다 .
그 층에서는 ..... 초인종상 시상식을 하고 있다 . 나는 점점
역 전체의 지네21 ..... 분위기에 어색함 없이 빠져들어가고







시상식 분위기는 무르익어 .... 따라하기 . 밀어붙이기 . 나눠먹기
등 주요 부문들이 수여되고 .... 평생공로부문 편가르기상이 수여되자
가르마에 금박물을 들인 거물이 나가서 초인종 세트를 받아오고
피날레에 바로 이어지는 리셉션에는 주최측의 관습대로 ....

게스트들은 끼리끼리 패거리로 구석에 몰려서 "위하여" ... 외친다
벽에 가득 붙은 사진들이 지겨움에 스스로 불타면서 몰랑몰랑
연기가 피고 ...... 천정의 방화셔터가 자동으로 내려오자
공간은 두 부류로 확실히 구분되어 버린다 ..... 87년과 89년 사이 ....

미묘하게 단절된 셔터안에서 주류들은 조폭들과 막춤을 추고
밖으로 밀려난 타인들은 구호를 외치며 뿔뿔히 흩어진다 ... 독립 !
찌르릉 .... 60년대식 초인종 소리 울리며 어쩔수 없는 축제가 끝나고
불타고난 그을음들이 눈깜빡이며 몰려가는 환승출구로 ...... 따라가면



갈아타는곳 .... 한 소녀가 귀신들이 어슬렁대는 통로를 지나가고
물에 잠긴 레일에 기차가 들어오자 .... 달리 카메라가 이동한다
표지판에 '블루와 오렌지의 행방불명' 이란 영화제목이 보이고
얼굴없는 귀신이 스르르 다가와 ... 내게 속삭인다 . 아 ... J ...

"여기는 마녀의 성이야 ... 일을 하던지 영화를 찍어야 살수 있지 .."
그러고 보니 ...... 소녀가 바닥을 닦고 .... 귀신들은 카메라를 돌리고 있다
무서운 마녀의 메가폰 지시대로 승강장은 반들반들 빛이난다
"마녀의 영화 촬영 세트를 낮동안 사람들이 전철역으로 쓰는거야 "

소녀를 따라 얼굴없는 J와 그림자들이 옛승차권으로 개찰하고
물위의 기차 .... 후미 신호등이 어두운 터널속으로 깜빡 .... 사라진다
"우리가 만든 세트와 각본대로 사람들은 살아갈거야 .... 언제까지나 "
영화땜에 얼굴을 잃은 가엾은 J ..... 이 역을 빠져 나가야겠어 ....









맨위층 출구 가까이 .... 전에 없던 샛길이 보이고 ... 낯익은 바이올린
솔로가 들린다 . 통로 끝 소실점 프레임에서 한 여인이 걸어오고
십대 소년이 바라본다 .... '미아리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 제목아래
어둠속에서 .... 건들거리며 낯익게 껌 씹으며 다가오는 그 여인은 ....

내 아내다 . 입가에 까망점 올디스 퍼머의 그녀가 나를 힐끔 보고 ...
"누구나 창녀역을 소망해 .... 오래 기다린 꿈이 이루어지는거야 ...."
감독은 나를 째려보고는 다음 장면을 지시한다 .... " 자 이번에는 ....
256명 남자와 동시윤간 장면이야 " 256 ..... 윤간 .... 안돼 ! .... 바락바락

악을 쓰다가 .... 한방 얻어맞고 쓰러진 .... 내가 다시 깨어났을때는
피투성이가 된 아내를 안고 소년이 떠나가고 있다 . 바이올린음 .....
그들이 625시대 전차를 타고 시야밖으로 사라지자 .... 난 펑펑 운다
주변이 소란해지면서 .... 사람들이 밀려오고 나랑 상관없이 .... 역안은







러시아워다 . 눈물로 뿌연 뷰에 .... 지나치는 승객들은 몽땅 어제밤의
스텝과 캐스트들이다 .... 오이도행 승강장 줄의 맨끝에는 블루톤 정장의
광녀가 서있고 .... 건달은 조간신문을 팔고있다 .... 그들을 붙잡고 ....
"이제 영화촬영 안하나요 .... ? ... 저 미아리 비상구팀 못 보셨나요 .... ? "

아무에게나 물어보지만 .... 연민 섞인 표정만 지을뿐 ... 외면한다
간밤의 촬영 지시 소리가 행선지 발착 안내로 바뀌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 넋이 빠진것처럼 어디론가 몰려서 오가고 있다 . 어쩌면
밤촬영을 위한 리허설 같기도 하다 .... 인간파도의 거대한 몹씬 ...

막막함에 탈진하는데 .... 승강장 끝 벤취에 각본 팔던 남자가 신문을
보고 있다 .... 그의 수많은 주머니에 있던 종이뭉치들이 다 사라졌다
"시나리오 많이 팔았나요 ?" ..... 대답없이 그는 도착한 전철로 가고
그가 남긴 신문은 ...... 한편의 대본이었다 .....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423번 전철역 . 한시절 영화의 성지였던 곳 . 이 주변에 밤이면
영화를 만들지 못해 한맺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 세월이 흐르고
그들중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 유령이 되어 돌아오고 ............... 껌딱지
만큼 작은 기획 사무실 직원 H와 J 는 여름 휴가기간동안 비디오

영화를 한편 계획한다 . 휴가첫날 . H는 시나리오를 맡은 J와 전철
역에서 만나 촬영장소를 찾기로 하는데 ......... 두시간 바람을 맞으며
...... 막가는 심정으로 지하역에서 밤 샐 궁리를 하는 H 앞에 .............
시나리오 귀신 . 멜로 귀신 . 느와르 귀신 ..... 들과 함께 .... J와 .....

영화에 미쳐서 이혼한 아내까지 나타나자 ........ H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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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 8. 6
tkhong .  letter@ange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