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다리 4 . 부산역


1969 . 봄 . 출발
깜장 염소떼 같은 중학생들이 우루루 개찰구에서 쏟아져 달려왔다 .
파스텔톤의 현대식 역사 .... 엄청난 콘크리트의 위압감 ..
수없이 갈라진 철로 .... 처음으로 코 앞에서 내려다 본 부두 ...
주홍색 디젤 기관차 ... 오렌지빛 거대한 무역선의 선체 .... 아이들은
환상의 빛과 무한한 흩어짐과 .... 상상을 넘어서는 부피에 질려가고 있었다

디젤 엔진 소음과 경적과 뱃고동이 엇갈리며 퍼지고 ... 차장으로 작은 손들이
한꺼번에 피어나와 봄바람을 흔들어 놓았다 .... 수학 여행 ... 서울로 ...
봄 햇살이 시작의 음절로 플랫폼에 쏟아지고 .... 아이들은 합창으로
키보이스의 .... 바닷가의 추억을 불렀다 ....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

1975 . 겨울 . 도착
깜깜한 새벽 .... 밀입국한 망명객처럼 스무살의 청춘이 계단을 하나씩
힘겹게 올라온다 ... 객차 밑바닥에서 피어나는 김이 시린 눈에 들어오고 ...
수정알처럼 얼어붙은 부두의 불빛들이 ... 플랫폼의 안개등과 입을 맞춘듯이
새벽 귀향객을 무시하고 있다 ... 동정 없는 겨울역에서 ..

후기까지 대학에 거절당한 재수생 ..... 수취인 없는 수하물이 되어
다리의 끝에 머문다 . 더이상 갈데가 없는 종착역 승객의 시큼한 무위를
배우고 있는 .... 무소속 청춘의 발 아래로 ... 마산발 아침 기차의 동력선이
회선하며 기지개를 피고있다 ... 스피커에서 아침 첫 곡으로 클라리넷 솔로 ...
a stranger in the shore 가 흘러나온다 ... 노래까지 비꼬는 새벽 ....





1983 . 가을 . 출발
해풍이 다리위를 흔들어 놓고 ... 지나간다 ... 하오의 역광 속으로 앞서 가는
라벤더 플리츠 스커트 자락이 기슭의 파도처럼 하늘거린다 ..... 천신만고 끝에
구한 첫 직장으로 급거 상경하는 달팽이 총각의 라벤더빛 꿈이 난간위에
펼쳐진다 .... "어디까지 가십니까 ..." 로 시작되는 그녀와의 긴 심포니 ...

동대구까지 ... 군사독재의 아픔과 ... 시대 정신으로 말문을 트고 ... 추풍령을
지날때쯤 ... 보헤미언 랩소디를 흥얼거리며 ... 감성적 동질화를 이루고 ...
아 ... 조치원을 통과한후 .... 애마부인의 예술성으로 손을 잡게 되겠지 ...
서울역 승강장에서 심신일체형 연인이 될 여자의 머리결이 ... 바람에 날리고
상행선로에 ....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이 흐른다 .... 라 비앙 로즈 ...

1989 . 여름 . 도착
건널다리에 에스컬레이트가 걸려 있었구나 ..... 그대 저절로 상승하리라 ...
첫 사업에 빚만 잔뜩 지고 ... 패자 부활전을 기대하는 남자 ... 발판에 오른다 .
그의 눈 앞으로 말리부형 히프와 ... 니스형 어깨가 ... 올리브향을 흩날린다
이제 막 여름을 소진할 비치 트레인의 여인들 ... 바다를 보며 발을 구르고 ...

올림픽을 마친 ... 나라의 삶은 그녀 젖가슴처럼 출렁이며 .. 고개를 내밀고 ...
에스컬레이트가 정점에 이르자 ... 웰컴투 푸산 비치 ... 배너가 파도친다
우울한 패자까지 ... 덩달아 들뜬다 ... 사기를 쳐서라도 부활하리라 ...
깔깔 폭소가 터져나오며 .... 서늘한 건널다리 골바람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오케스트라의 .... a summer place 가 흐른다 ...... 빈자의 여름 ...






1996 . 가을 . 출발
공산당원들처럼 뱃지를 단 젊음들이 다리로 나온다 ... 부산국제 영화제 ...
짧은 시간 한꺼번에 주입한 꿈의 부피로 인해 ... 지상에 발이 떠있는채 ...
꾸역꾸역 .... 걸어가는 그들의 엉덩이에서 ... 바람이 조금씩 빠져나오면서 ....
건널다리에는 아트 건더기와 ... 영상 쪼가리와 꿈사탕 부스러기가 흐른다

영화에 홀딱 빠진 도시처럼 ... 부두에서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가 ... 철도에는
위선의 태양이 ... 차도에는 크래쉬가 ... 저절로 리메이크되고 ... 시대의
카멜레온 남자 출장내려 왔다가 ... 은막의 세례를 받고 ... 다리를 지나간다 .
난간과 지붕사이 거대한 스크린에 ... 철로의 신호등이 푸른빛을 보내주고 ....
기차가 출발하자 트럼펫 솔로로 ... 바다의 협주곡이 흐른다 .... 꿈이여 안녕






2001 . 겨울 . 도착
객차에서 퍼부운 맥주로 맛이간 술꾼 ... 기우뚱 ... 에스컬레이터에 오른다 .
디젤 기적 ...... 언제나 기억의 한 귀퉁이를 리모트 콘트롤하던 소리가
종착역에 마이너 음표 하나 붙여 놓는다 ... 다리에 오르면
부두와 플랫폼의 불빛들이 세월의 간격을 가리키며 나란히 서있다 .

흐르는 것들의 바다에서 동경과 망각의 부표로 떠있는 건널다리에 ....
누구보다 먼저 마중나온 바닷 바람이 술꾼을 안아준다 ... 시작과 끝이
나란히 달리는 철로 위에서는 ... 이미 출발에 도착이 그려졌다는걸
다리의 중간쯤에서 알게 된 술꾼 ... 오래된 일기장을 향해 손을 흔들며 ...
갈라진 음성으로 ... 해변으로 가요 ... 를 부르자 ... 어디선가 코라스가 들린다 .




2001 . 12. 11
tkhong .  letter@ange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