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계단의 비명


공우의 기억

밤이 깊도록 하늘은 빨간색이었다 . 사람들은 길에 나오거나 창가에 붙어 서서 웅성대고 있었다 . 바람이 불어오면 불길은 이곳까지 오지 않을까 . 그을음이 버스로 몇 정거장 너머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 역은 밤 새도록 불타고 있었다 . 그날밤 새빨간 하늘 아래 바다가 밀려오는 꿈을 꾸었다 .

부산역이 사라지고 바다를 메운 벌판은 오래도록 빈 땅으로 남아있었다 . 역은 어떻게 생겼던 것일까 ... 서울역 돔을 좀 작게 그려보기도 하고 근처에 있던 고딕풍의 세관 건물을 확대해 보기도 했다 . 새빨간 밤에 사라진 붉은벽돌 역 .


사십계단 . 근처에 있던 국제극장에서 단체 영화를 보고 나와서 계단을 처음 봤었다 . 전쟁 피난민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빠지지 않던 거인 같은 계단 . 오래전에는 바다와 붉은 역과 나무들 그리고 계단이 있었으리라 ... 아이들은 이 계단이 자랑스러웠다 . 그때부터 이미 계단은 홀로 남아서 옛 이야기를 전할 운명이었던것 같다 .

계단을 올라가면 극장과 문화원 화랑과 고서점 그리고 국제 시장으로 연결되어 가는 축이 있었지만 모래바람이 쓸고가듯 극장도 서점도 사라지고 묘비명처럼 맨 밑단에는 유행가 가사가 적힌 돌이 천덕스럽게 남아있다 .



계단에서 내려와 부둣길과 큰 도로가 만나는 삼거리에 있던 세관 건물마저 헐려 나갔다 . 바다와 육지의 과거 현관이 다 사라져갔다 . 중세도 근대도 없이 구멍 뚫린 현대의 거리에 저녁이 오고 ... 아르누보도 모더니즘도 보지 못한 대량 생산의 자동차들이 불을 밝히고 달려온다


사십계단이 건물이었다면 아마 그마저 사라졌을것이다 . 계단은 옛 꼭지점들을 잃어버리고 선을 이루지도 못한 외로운 점으로 남아있다 .... 눈 앞의 일방통행길을 따라 흐르는 강에 퇴적된 모래톱 같은 계단 위로 오래전 빨간 하늘을 가로질러 비명이 떨어진다



이지의 기억

레인코트의 남자가 차문을 열고 나왔다 . 계단 위로 은행 잎이 지고 있었고 비가 쏟아졌다 . 백밀러에 남자의 모습이 흔들렸다 . 계단 위에 서 있던 얼굴에 수직으로 칼이 그어졌다 .
'홀리데이' 가 흐르고 있었다 .

사십계단 동네에 어둠이 내려오고 영화 제목을 딴 카페에 불이 들어온다 국밥집과 명함 만드는집이 나란히 서있고 ..... 계단의 레몬빛 등이 어둠을 밀어낸다 . 반도호텔 나이트 클럽의 불빛이 사라진지는 오래됐다 .



이 가파른 계단이 다리를 굵게 만든다고 여학생들은 악몽처럼 지겨워했었다 . 밉살맞게 이름에 지겨운 숫자를 붙여 놓다니 ... 히치콕의 '39계단' + 1 .... 초 중 고 12년을 이 길을 따라 초록빛 건물의 학교로 올라갔었다 . 계단이 현관문 같고 콘크리트가 나무바닥처럼 삐걱이는것 같다.


 

락의 볼륨이 거슬린다는 느낌이 들때면 광복동에서 길을 넘어 이 동네로 넘어왔다 . 콜라보다는 하이볼이 ... 리바이스보단 샤넬이 ... 브루스 리보단 숀 코넬리에 어울리는 동네였다 . 정장을 하고 파이프 향기 감도는 바에서 어프리코트 브랜디를 홀짝이며 퇴근하는 남자를 기다리는 곳이었다 .


운전석이 오른쪽인 미쓰비시가 맹추처럼 주차되어 있었고 커피숍 갓등 아래 길잃은 모리신 이찌가 떨고 있었다 . 낮에는 오피스 군이 밤이면 펑키 타운으로 변하는 거리에 새벽이면 춤추다 만난 커플이 보니엠을 흥얼거리며 해장국집으로 찾아 들었다 .

종이뭉치를 짊어진 남자가 계단을 내려가고 ... 비빔국수를 머리에 인 아줌마가 올라온다 . 계단에 앉아 건너편 길을 바라본다 . 일방통행 길은 보고 있으면 맘속으로 알맞게 들어 앉는다 . 영화에서 나왔던 홀리데이를 불러본다 ....
하릴 없이 돌을 던지는 휴일 ..... 적당히 계단을 닮은 노래다 .


레인 코트의 남자는 영화에서 끝없이 도망을 가야했다 . 계단은 출구가 없는 막다른 길이었다 . 노랑 유치원 옷 아이가 아장아장 계단을 내려갔다 . 비가 마지막 낙엽까지 쓸어가며 쏟아져 내리고 계단 위에 레인코트의 남자가 쓰러져 있다 .

사십 계단을 수직으로 길게 비명이 울린다





2001 . 7. 22.
tkhong .  letter@ange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