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영극장 . 제일극장


이지의 기억

별들의 고향을 부영극장 3층에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남자애랑 보고 있었다 . 그때에는 무척 야한 영화였다 . 남자애가 키쓰를 하자고 속삭였고 ... 경아보다 몇배쯤 더 오래 입을 맞추었다 . 오후의 깊숙한 3층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극장 전체가 눈아래에 있었다

경아가 죽고 강물에 하얀 가루가 뿌려지면서 테마음악이 나오자 남자애랑 둘이서 울었다 . 거의 영화를 못봤는데도 그냥 무지 슬펐다 . 부영극장 3층의 그 깊이를 사랑했던 날들이 있었다 . 그 커다란 공기속에서는 키쓰와 눈물이 다 같이 가능했다 . 영화 속 같은 극장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 옆건물에 있던 음악실에서 .... 그대와 키쓰를 하고 남은 건 감기뿐이네요 ... 란 가사의 I'll never fall in love 를 따라 불렀었다 . 극장과 붙어있던 부영 제과에서 오란다 빵을 먹었고 ... 집을 나와서는 골목안에 있는 부영 여인숙에 있었다 ... 극장 근처를 벗어나본적이 없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부영극장이 완전히 헐리고 상가가 들어선다는 광고가 보인다 . 영화제가 열리던 첫 해 크래쉬를 보려는 사람들이 한 블록 너머까지 꼬리를 물고 줄지어 있었던 축제의 장이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

극장에는 양 옆으로 난 화장실로 가는 긴 복도가 있었고 벽에는 거울이 깔려있었다 . 약간의 경사가 진 복도를 걸어가면 거울에 영화와는 너무 다른 내 모습이 비쳐지고 형광등 아래에서 차가운 배반감에 떨곤 했었다

어느해 연말 ... 여인숙비가 없어 창으로 도망쳐 나와 슬리퍼와 얇은 셔츠 바람으로 영화를 보러 들어왔다 . '대결'이란 영화였는데 알콜 중독자 이브몽땅이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이 끝나고 ...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영화가 삶이고 극장이 집 같았던 기억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지금도 그 앞으로 지나가면 .... 오래된 사랑의 테마가 들리는것 같다




공우의 기억

제일극장에서 테스를 하고 있을때였다 . 뒷자리에서 아주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영화 내내 들렸다 . 십대의 여배우가 딸기를 따먹는 영화에서 그 작은 소리는 사운드 트랙의 일부처럼 녹아들어갔다

영화가 끝나고 봤더니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안경을 잃어버린 친구를 위해 자막을 읽어줬다며 미안해했다 . 3층까지 객석이 있는 깊은 공간에서 낮은 소음 정도는 영화와 함께 묻혀서 바람소리가 되기도 했다 . 그후로 폴란스키의 테스에는 소녀의 작은 목소리가 기억속에 자리하고 있다

제일극장은 서울에서 사라진 국도극장처럼 이층으로 향해 역동적인 돌음 계단이 있던 고전적인 극장이었다 . 두번째 맞는 영화제에서 소쿠로프의 어머니와 아들을 할때는 드문드문 비어있는 깊은 공간으로 러시아의 외딴집에 부는 바람이 스며들었다 . 어떤 영화들에는 그만한 볼륨의 극장이 필요하다

근처에는 오래된 완당집이 있었고 영화를 보고 나오면 극장 앞에 있는 커다란 레코드 숍에서 프랑크 포셀이나 미스틱 무드 오케스트라가 엔딩 타이틀의 여운을 이어주고 있었다 .

첫회 영화제 때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부영극장에서 봤었다 . 딥퍼플이 오래된 이야기처럼 흘렀었다 ..... 장대한 화면과 sweet child in time 의 그 부피는 몇등분으로 쪼개진 멀티 플렉스의 밀도에서는 포용될 수 없는 것들이다 .

어릴때 부영극장에는 한번 들어가면 몇번씩이나 영화를 보고 삼층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곤 했었다 . 발코니 석에서 스팅을 보고나와서 화장실로 가는 거울에서 폴 뉴만처럼 걷다가 생각에 잠기는척 했었고 ....

어느해 겨울  대결이란 영화를 봤었다 . 탈옥수 알랑 들롱이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이 끝나고 복도로 나왔는데 거울 앞에서 슬리퍼 바람으로 얇은 옷을 입고 울고 있는 여자애를 본적이 있었다 . 부영극장의 깊은 복도를 기억하면 늘 남아있는 장면이다

영화가 꿈이고 극장이 놀이터 같았던 시간들이 지나가고 이제 그 자리에서는 주인공이 죽으면서 끝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려진다 .



2001 . 3 . 15
tkhong .  letter@ange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