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방 . 어두워질 때까지
by RAN



블랙커피 유리잔 수면에 빛이 반짝인다
돌이킬 수 없는 어둠의 늪 같은 한모금을 마신다
사랑을 나누기전에 바라보던 ... 그런 어둠이다



치명적인 유전병으로 선천성 화류 기질 아라는 ...
나비에 둘러싸인 여신처럼 낮동안 잠자고 ... 본능의 물결이
차오르는 밤이 오면 ... 창백한 달 그림자가 되고
하늘가득 빗물이 되고 . 아무도 모를 더운 바람이 된다

피속에 돌아다니는 꽃들이 몸 속 깊이마다 활짝 피어나
남자 없는 서병동 외로움 속에서도 ... 요부 천성과
얼음 미모는 나날이 짙어갔다 . 저홀로 유혹적이었고 ...
스스로 비할데 없는 자연의 열광을 깨쳐갔다

붉은등과 금가루와 네온 ... 푸른 소매와 은빛 레이스 ...
라벤더 베일과 카날리아 리본 ...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유혹의 이미지들이 의식의 바닥에서부터 전극처럼 깜빡이며
떠올랐다 사라져갔다 . 유전은 상상속으로 먼저 왔다

이 저녁 . 지존의 화류 상속녀와 . 꽃의 속삭임을 듣는
사랑의 전령 나비가 죽음 같은 어둠의 복도로 나온다
바람과 빛이 전혀 없는 공간에서 ... 나비의 날개 소리를
꽃잎의 맥박 소리가 ... 파장을 그리며 따라간다

아라는 . 알 수 없는 이미지가 떠오르던 상상의 늪처럼
절대암흑이 편해진다 . 나비가 일으키는 섬모 바람에 ...
데자뷰 끄나풀처럼 물냄새가 스미고 ... 불꽃처럼
푸른빛 점이 허공에 찍혔다 사라지곤 한다



1953년 겨울밤 . 미미와 나는 어두운 방안에서 발가벗고
서로 다리 사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 식어가는
유리잔 커피가 있었고 ... 반쪽달 희미한 빛이 창으로
들어왔다 . 음부와 음모가 한묶음 어두운 정물 같았다

다리를 벌리고 고개를 숙인채 . 아무말도 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갔다 . 달이 구름을 비껴나왔던가 .....
미미 다리 사이에 먼지처럼 작은빛이 반짝이다가
은하의 빛처럼 조금씩 퍼져나왔다 . 밤 속의 물처럼 ...

미미는 내가 어느 한곳을 쳐다봐서 그렇다고 했다
그곳은 방황과 탐색과 순례가 끝나고 ... 열망이 시작되는
점이라고 했다 . 미미의 포인트 . 경계에서 전신으로 ...
어둠을 빛으로 이끄는 점을 ... 나는 그렇게 찾고 싶어했다



어느순간 . 열망하는 거울처럼 . 끝없는 어둠속에서
아라는 상상이 푸른빛 점으로 펼쳐지는걸 본다 . 그 빛에
날개를 감기듯 물들이며 나비가 건널다리로 나오고
한치 망설임 없이 ... 정해진 길처럼 아라는 ...

물이 찰랑이는 다리를 건너 ... 불빛이 밝혀진 단 한곳
수술부 01O방에 들어간다 . 사흘 밤마다 . 첫날 입구에서
본 루사를 기다리다 새벽이면 서병동으로 돌아간다
수술대에 초록 시트 덮고 꽃잎처럼 누워 ....

본능으로 ... 아라는 오늘밤 남자들의 방문을 예감한다
달의 꽃처럼 화사해진 얼굴을 ... 주사받침대에 앉은 나비가
바라보고 ... 등잔불 수술방이 밀교의 오두막처럼 가라앉는다
공간의 부피가 아라의 여운으로 남김없이 채워진다



미미가 죽고 이듬해 태어난 아라 ... 두여자는 서로를 모른다
나는 미미의 영혼으로 중앙진료부를 설계하면서 ...
수술부 첫째방을 ... 순례의 끝 열망의 시작 ... 이라던
미미의 포인트로 만들고 싶었다 . 천부적 감각으로 ...

아라가 찾아낸 이방은 ... 일반 수술방과 유니트 구조가
다른바 없지만 ... 벽체의 켜마다 미미의 욕망을 그리며 쌓아올려
영혼 정서의 정점이 되는 곳이다 . 방문이 열리면서부터
건널다리 바닥에 ... 종아리가 잠길만큼 물이 흐른다



달이 뜰때쯤 . 먼저 스토커가 건널다리에 왔다 . 이 연약한
감성 남자가 짚을데 하나 없는 어둠을 뚫고 온 것은
기적이었다 . 여자를 보겠다는 단순한 집념으로 ....
생애를 보상할만큼 환장할 용기로 기어온 것이다

물의 촉감 . 달콤하고 포근한 냄새 . 가녀린 창가의 빛
밀려오는 따스한 공기 . 미쳐버릴 음기의 그리움에
공황 상태가 되는 스토커 .... 이런 밤은 없었다
유리창에 흐르는 풀내음 물기를 몸서리 치게 핥는 동안 ....

다리가 끝나는 홀에 비치는 세로줄 빛을 본다 . 그방이
수술방이란걸 아는 이 박학한 남자는 ... 문틈 가까이에서
녹색 모포 밖으로 나온 발바닥을 보고 충격으로 미끄러져
계단실까지 밀려간다 . 자위의 성자가 여자 살을 본 것이다



절망 같은 어둠의 벽을 짚고 ... 굴러서 상처 투성이로 복도를
건너온 스토커 ... 여자를 찾아왔으면서 다가서지도 못하고
다리 바닥에 고인 물 첨벙이며 나름대로 소란을 피다 ...
달빛이 풀어놓은 한심한 그림자 위에 엎어진다

손을 내밀 여자는 없다 . 너무 잘 알기에 스토커는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고 ... 밤의 일상 .. 자위를 시작한다
흐르는 물이 항문털을 물풀처럼 흔들며 지나가고 ...
사정을 하고나면 여자에게 가리라 .. 다짐하다 또 하고 ...

오늘따라 더 기막혀 보이는 달빛을 외면하며 하고
여자에게 들리도록 ... 세레나데를 부르고 또 하고 ...
수술방 앞까지 갔다가 튀듯이 돌아와서 하고
어느덧 . 성기 껍질의 피가 손바닥에 묻어나오자 ...

층고 3600밀리 이끼 가득한 미목 건널다리 한구석에
등을 기댄 스토커 ... 무릎에 얼굴 묻고 통곡한다
처음과 끝이 유리알처럼 비치는 ... 그를 두고
달이 정액 뭉테기 같은 달무리를 빠져 나간다



달이 하늘 꼭지에 이르자 . 사사가 건널다리를 넘어왔다
이 영리한 깡패 닥터는 등불과 진찰 플래쉬까지 들고
어둠속으로 들어왔지만 ... 암흑이 빛들을 금방 삼켜버리자
바닥을 기며 돌아갈 방향마저 잃은 지점에서 ....

안개의 촉감 같은 습기와 물풀 냄새 같은 온기가
밀려오는 방향으로 굴러왔다 . 이끼와 어둠의 분진으로
검푸른빛이 된 가운차림 사사는 .. 건널다리 물기를 샘플병에
담고 ... 어깨폭만큼 열린 수술방으로 다가간다



수술부 01O방 문은 남자들이 하나씩 다가올때마다 조금씩
더 열려간다 . 아라는 여전히 수술대위에 누워있고 ...
미미의 영혼이 경첩을 조금씩 돌리고 있다
건널다리가 먼저 젖고 ... 문이 열린다

아라는 잠들지 않는다 . 언제나처럼
상상의 늪에 어둠이 채워지고 ....
하얀 옷 남자가 떠오른다



2003 . 12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