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 페레가모에서 죽다


바닥 재료분리대 백밀리쯤 안에서 ... 매니저가 화사한 미소를 보낸다
일곱겹 니스칠 원목에 반사된 할로겐빛이 그의 눈동자에 깔리는 ...
목요일 일곱시 ... 권태가 구두굽만큼 휘청이는 시각이면 그가
나타난다 . 쇼케이스에서 육백밀리 ... 오차없는 거리에서 삼분 ...
정물 같은 시간을 보내고 .. 샤넬 클라인 미야케 ... 스치며 나온다


브랜드 몰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고객들 뿐 ... 숖마다 새 디자인이
디스플레이 되는 날 ... 앙상블처럼 정해진 시간에 나타나는 ... 스타일
짙은 남자 ... 그를 기다림은 물리칠 수 없는 ... 몰의 기쁨이다



하루에 버터와플 하나 소주 한병 우유 한잔 .... 4주째 ... 배설은
피밖에 안나오고 ... 더 이상 팔 물건도 없다 . 지하골방 벽에 ...
브랜드별 순례 일정이 빼곡히 적힌 일정표를 보며 ... 오한과 술기운
겹치며 땀에 젖은 눈빛으로 미소 .... 24년이었어 ... 천정에서 쥐가
고개를 내밀지만 ... 눈 깜빡하지 않는다 ... 노블리스 오블리제 ...


핏기가 일밀리도 남지 않은 얼굴에 ... 정성들여 화장한다 . 클라린스
립스틱 ... 눈화장은 스틸라 라일락톤 ... 쿵쿵- 심장이 울리고 바닥이
빙글댄다 . 얼마 남아있지 않았어 ... 손이 떨려 두 손으로 그린다



시야에 마지막 들어온 것은 겐조 원피스의 선홍빛 ... 그 후론 ...
크림빛 팔레트에 사방이 섞인채 ... 빛줄기만 일렁이지만 ... 눈 감아도
지나갈 수 있는 곳이다 . 톰포드 새 드레스를 보고 싶었는데 ..
도나카렌을 지나자 ... 하얀빛 꼬리가 잠깐 일렁이다 사라진다


페레가모 매니저는 쇼윈도 틈으로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전율한다
오늘따라 비칠대는 걸음걸이 ... 그가 기이한 아티스트라는 .. 한치의
의심 없는 신념을 가진 그녀는 ... 행위예술에 감격해 부들부들
떨다가 ... 숖 턱에서 쓰러지자 ... 눈물을 글썽이며 주저 앉는다


숨이 끊어진 그는 .... 난해함의 깊이에 빠져있는 .....
예술과 패션을 사랑하는 브랜드 매니저의 품에 ...
그가 언제나 그 숖 앞에서 보내던 시간 동안
안겨있었다




2003.1.14


26 . 어느 미친 노예 이야기


그는 어느날 문득 ...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는 일도 님도 집도 없었고 ... 차도 개도 없었다
갈대줄기 같은 삶이었지만 무언가 남길게 있으리라 ...
얼마 남은 돈으로 작은 방을 얻고 ... 소주와 김과 치즈를 사고 ...
웹에 페이지 하나 만들고 그날부터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창밖에 ... 버려진 공터 한쪽 허접한 목재소에서 ... 그는
정경부인 타잎 후덕한 몸매 까망 똥꼬치마 차배달녀를 보았다
못박힌 송판들 사이를 빠져나오는 노랑 하이힐의 트로트 ...
그는 하루 한번 그녀의 가루가 씹히는 커피를 마셨다

홈페이지에 그는 ... 날짜와 시간 ... 그밖에 터진 물꼬처럼 이어지는
숫자들만 빼곡히 찍어 올리고 ... 소주에 취해 창밖을 보며 살아갔다
배달녀가 제재목에 미끄러져 스타킹을 찢고 훌쩍이던 날은 그도
울먹이며 가슴 바닥에서 떠오르는 난수들을 적어나갔다

계절의 복판에서 배달녀는 그에게 다른 부가서비스를 원하는지 ...
물어보았다 .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 기능과 욕구중 어느것이
먼저 떠났는지 모를 그의 유리물잔에 ... 햇살먼지만 반짝였고 ...
겨울이 오고 목재에 비닐을 씌우던 날 ... 배달녀는 동네를 떠났다



함박눈이 펑펑오던 어느 오후 ... 그의 홈피에 따스함 가득한 글이
올라왔다 . 답을 보내려던 그에게 ... 글자 단어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 숫자로만 생각을 해왔던 그는 ... 고민끝에 간곡한 마음을
숫자로 써서 답했다 . 그러자 연민에 찬 숫자 사연이 다시 올라왔다

조랑말의 기수 같은 서퍼가 그의 홈피를 찾아내고 ... 알전구 스위치
같은 어날리스터가 ... 정신병리학적으로 단면을 끊어냈다 . 덕분에 ...
그의 홈피는 잠시 바람을 타기도 했다 . 몇겹의 휴머니티로 채워진
숫자들이 올라왔다 . 그는 꼬박꼬박 정성들인 숫자로 답했다

목재소 담장에 목련이 필 때쯤부터 그가 웹에서 사라졌다 .
자상한 네티즌들이 그를 몇번인가 찾았지만 ... 아무 대답이 없었다
공터 입구길이 떨어진 벗꽃으로 덮이던 언제쯤 ...
그는 겨울꽃처럼 잊혀졌다



숫자만 하염없이 남아있는 그의 사이트 ....
어느 페이지 끝에
누군가 쓴 이런 ‘글자’가 있었다
끈풀린 노예에게 ....

2003.1.25


27 . 기차 놀이


1번여자 화장실에서 올나간 스타킹올 벗는다 . 객차안은 온실처럼
포근하다 . 질펀하게 자보는거야 .... 기차가 출발하자 바로 잠든다


2번남자 질퍽 ... 고인침을 삼키고 길게 한숨쉰다 . 옆자리 1번여자
맨 허벅지에 햇살이 반짝인다 . 손톱을 물어뜯고 머리칼을 움켜쥐다
창문에 콩콩 이마를 받는다 . 그 소리에 여자가 다리를 꼬자 벌떡
일어나 통로로 나온다 . 2번남자 화장실에서 44일만에 자위한다 .
그의 팽팽함을 떠난 물기들이 열차 진행방향과 상관없이 흩어진다


3번여자 통로에서 아찔한 후각을 느낀다 . 2번남자 소매에 달려있는
죽은 유전자 한방울을 보고 ... 객차가 싫어진 3번여자 식당차로 간다
온더락 잔술을 마시며 점점 비감해지는 이혼후 300일의
3번여자 ... 환멸 연민 그리움이 범벅된다 . 개새끼들 ...


4번남자 만원 식당차에서 3번여자와 합석한다 . 덜익힌 고기를 막
삼키는데 앞자리 여자가 째려본다 . 씨 .. 뚱보가 스테이크 먹는거
첨봐 ... ? 촉촉한 눈빛으로 4번남자를 보는 3번여자 ... 4번남자 고개
푹 숙이고 고기 씹는다 . 자리에 돌아온 4번남자 더부룩한 속에
캔맥주를 붓는다 . 뱃살을 움켜쥐다 또 캔을 따고 ....


5번여자 중간역에서 기차에 탄다 . 옆자리 술취한 뚱보가 뭐라고
주절댄다 . 저 .. 제가 많이 뚱뚱해 보이나요 .. 제가요 어릴땐요 .....
5번여자 옆자리의 비극에 갑갑하다 . 통로로 나온 5번여자 담배 핀다
살 빼야겠어 ... 거푸 다짐하며 5번여자 심각하게 줄담배 핀다


6번남자 통로에서 고뇌에 찬 여인상을 본다 . 슬픔으로 창백한
이상형 ... 5번여자가 객차로 돌아간 후에도 6번남자 얼어붙듯 서있다
종착역이 가깝도록 6번남자 ... 그녀가 다시 나오길 기다린다


1번여자 통로로 나오다 6번남자와 눈 마주친다 . 푸짐한 수면 후
상큼한 남자를 본 1번여자 ... 스타킹 신으려던 화장실 앞에서 어정쩡
연약하게 휘청이다 핸폰이 바닥에 떨어지자 ... 6번남자 잽싸게 줏고 ..
1번여자 핑크톤 포장지 미소에 ... 6번남자 한숨을 가린다



종착역 택시 정류장 ... 나란히 줄 서있는 2 . 3 . 4 . 5 . 6 . 1 번
남자와 여자들은 겨울광장의 찬바람이 불어오자 ... 풀리다 만 하늘을
쳐다보고 .... 낯익은 줄서기의 끝나감에 ... 고개를 떨군다




2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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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해로움 없이 나누는 날까지 지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