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 넘버로 남은 승강장


마지막 전철을 기다리는 지하 승강장 . 복잡한 바람이 불고
바닥에 닿을만큼 긴 하얀 목도리의 소녀가 선채 끄덕끄덕 졸고
배퉁이 남자가 소녀를 분해시킨 시선으로 딸꾹질 하고
긴의자에서 소년이 손바닥에 담뱃불을 눌러 끈다

치질병원 광고 아크릴 판떼기가 파르르 떨고
기둥에 역표지 번호판이 흔들흔들 툭- 떨어지고
커플이 케잌에 꽂을 초와 장미송이 수를 세다가 마주보며 침뱉고
전광판에 다음 열차의 행선지가 숫자로 나타난다



주민등록번호 . 카드번호 . 패스워드 따위를 중얼중얼 외는 소리 ...
마빡에 난수를 새기고 물파랑 전철이 승강장을 지나치고
소녀는 리본체조하듯 발목을 쥐고 목도리 휘날리며 돌고 ...
여치처럼 고개숙인 소년이 캠코더로 노란선을 찍으며 걸어간다

전광판마다 한아름의 매트릭스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역무원이 경매하듯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시하고
객들은 핸폰을 꺼내들고 저마다 숫자를 만들어서 흔들어대고 ....
배퉁이남자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붕알의 소수를 확인한다

새하얀 알미늄에 무한순열을 표시한 전철이 불 끄고 들어오자
기를 쓰고 타는 승객들 ... 끄윽- 닫긴 승강문틈으로
사이즈들을 표시한 꼬리표가 대롱대롱 매달린채 전철 떠나간다
85 . 165 . 7 . 28 . 99 ....



빈 승강장 모니터에 소년이 찍었던 노랑색 화면만 하염없이 뜨고 ...
소녀는 가방에서 여러장의 성적표를 꺼내 바닥에 깔고
흰 목도리를 온몸에 감고 그 위에 눕는다

그리하여 ..... 깊은밤
버리고간 숫자들이 기어나와 어지러운 승강장 바닥에 ....
작은 미이라 하나 잠들어 있다




2002.11.09



14 . 부두의 기억


초등학교 때 테레비에서 LP를 턴테이블에 올리면
노래가 흐르는 동안 신동우 화백이 그림을 그렸었다

노래들보다 화백님의 그림이 너무 신비로웠다
슥슥 목탄 같은걸로 음악이 흐르는 3분쯤 시간동안
재빨리 걸맞는 분위기의 그림 하나를 완성시키고나면
진행자가 아- 감탄하고, 신화백이 그림 해설도 하던
2차원 수작업 뮤직 비디오인 셈이었다

이 노랠 거기서 첨 들었다 . 그림과 노래의 톤이 초딩 마음을
깜짝 흔들만큼 사로잡았었다 . 막 배우던 휘파람으로 늦은밤
창문을 열어두고 노래 끝부분처럼 휙- 휙 불어대다가
야단도 여러 번 맞았다 . 밤 휘파람은 주술적 금기사항이었다



찻길 두번 건너면 펼쳐지는 부두에 철조망 개구멍으로 들어가서
석필따위를 줏어오던 시절이었다 . 데크에 퍼질고 앉아
물뱀에게 돌멩이 던지고, 화물선 깃발들을 세보기도 했었다
잡혀서 아작나는 날도 있었지만 구멍은 어디에나 있었다

테레비에서 본 그림처럼 휘파람을 불며 폼 잡던
어린 시절도 지나고 ... 요절한 가수의 이야기도 알게되었고 ...
영화 '탑건'에서 탐크루즈가 이 노래와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장면 보며 ... 부두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기도 했다



이제 내가 노래속 남자처럼 한심하게 바다를 바라보아야 할 나이인데 ...
내 앞에는 부두가 없다 . 살다보면 처량한 정서 중에도 부득히
부둣가에 앉아서 청승을 떨어야 어울릴 것 같은 기분도 있는 것이다
부산은 이미 이런 부두가 아니고 ... 서군산 쯤이면 어울릴까 ...

지난주 어느 술자리에서 신화백님 돌아가시기 전 이야기를 들었었다
지금도 하얀 캔버스에 음악을 담아내던 그림이 잡힐듯이 떠오른다
노래가 끝날 때 쯤이면 부두에 앉은 남자의 등짝에 입혀지던
랜더링 터취가 바다멀리 던지는 휘파람 소리를 닮아가던 ......




2002.11.15
2005.06.15  Rev.




15 . 사창가 소주집에서


그가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왔을때는
막 사회에 발을 붙이며 거친 통나무처럼 살아가던 날들이었다 .
침상에 누워있는 그는 예전처럼 삐죽삐죽 농담을 던졌지만
예사로울 수가 없었다 . 피 돌음이 잘 되지 않는 심각한 병으로
몇번씩 까뒤집는 검사 끝에 ....
한쪽 다리를 자르는 수술로 결론이 났다 .

친구 둘이 번갈아가며 병원을 찾아갔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수술을 이틀 남겨둔 어느 오후 , 그 날은 외출이 허락되었다
두 다리로 마지막 걸을 수 있는 날 . 그와 친구 둘은
병원에서 나와 겨울이 오며 신랄해진 젊은 거리를 걸었다

어디든지 가고 싶은 데를 말해봐 돈 걱정하지 말고
몇번 물었지만 그는 마냥 걷자고만 했다 .
진눈깨비가 흩어졌고 , 거리가 조금씩 어두워지는데
마음 밑바닥에 불꽃이 튀는듯 쓴 웃음을 짓던 그가
여자랑 자고 싶어 ..... 라고 했다



수술 전날 저녁 . 몇개의 기적같은 굴절이 있었다한다
그리고 다시 결정이 번복되어 몇 굽이의 상처만 남기고
그의 다리는 절단되지 않고 수술을 마칠 수 있었다 .
얼마후 퇴원한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느날 저녁 석양이 지는 시간
광장 옆 성모상에 기도하는 여자를 보았고,
오렌지빛 허공에 작은 빛무리 같은 그녀의 등을 보고
한산한 밤이면 병실에서 나와 성모상에 가서 기도를 했다'

기도가 전달되었던지 그는 다리를 살려냈다
우리는 그가 관계했던 창녀의 은혜가 아닐까 했다
성스러움과 비천함은 멀지 않을거 같았다



그후 나는 몇번쯤 성모상 앞을 지나갔다
때로는 남의 옷을 걸친것 같았고 때로는 어디선지 빈바람이 불었다
나는 그때마다 얼마나 기도를 하고 싶었던가 ...

그가 여자와 자고 싶다고했던 그 날
유리 미닫이 문이 있는 집에 그를 밀어넣고나서
우리는 가게에서 소주를 마셨다
아무 말도 없이 거푸 잔을 비우는데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나왔다 .
아마 우리 둘중 한 사람이 울었던거 같다
우연처럼 술이 취했었다

200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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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해로움 없이 나누는 날까지 지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