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 멀어져가는 레일


두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나는 기억을 잃어버렸다
오늘은 겨울이 가는 날 . 환승역 계단에 녹은 눈
질척이는 발자국이 찍히고 있었다 . 결국 ...
기억을 버리려 나갔었나 ... 노선처럼이야 안되겠지
승강장 벽에 붙은 원색 선들 . 나는 오늘 면도를 했었지

기억이 사라지면 . 교외선의 마지막 구간처럼 더 이상
새 기억이 들어오지 않는다 . 죽은 물고기들을 담고
치열한 주정의 건더기로 ... 나무젓가락 같은 각오를 한다
다짐도 회한도 전철의 전극처럼 운행중에만 가능하다
깡술은 신비하기도 하지 . 저홀로 교호하며 돌아다닌다

마지막 전철은 필름이 끊긴 생애에 너무 잘 순응한다
내 교활한 취기가 금속성 광택처럼 객차의 무드가 되고 ...
진행방향으로 왼쪽만 열리는 문처럼 ... 나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 하나만 씹고있다 . 너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우리가 서있던 승강장에 바람이 들어오고 . 겨울은 떠났다



나는 언제나 흔들리고 있었다 . 안내방송을 흘리며 졸았지만
행운처럼 빠짐없이 정차역에 내렸고 . 사랑한다고 말했다
깜깜한 어둠속을 달리면서 균질한 조명만큼 달콤했고
텅빈 승강장을 지나면서 승강 문짝만한 성욕을 달랬다
레일에게 밀려나는 쇠바퀴의 비명을 들어본적도 없었다

시간이 깊었겠지 . 이제 더 이상 환승역이 남아있지 않다
멀어지는 한 방향으로 기댄 손잡이들이 우수처럼 흔들린다
흐린눈 디지털 표지판에 니가 한 마지막 말들이 찍힌다
액정 모니터에 멸시의 키워드들이 단출하게 나타난다
나는 마지막에 떠난 열차의 부품처럼 단조로워진다



객차가 자꾸만 비어 간다 . 할말을 잃은 놈처럼 ...
주정이 진정을 누른 놈처럼 . 차창이 멍든다
기억을 아작낸 놈처럼 . 허영으로 빛난다

열량 전철이 온전히 너에게서 멀어진다
붙잡을데 하나 없이 남겨진 나는
죽은 기억을 꼭 쥐고있다






2004 . 3 . 12



35 . 낮은 소리 로비


병원에 밤이 오면 . 간만 폭이 큰 바다 밀리고 밀려온다
촘촘히 갈라놓은 동선이 한가닥으로 흐르는 시간 ...
단단하지 못한 각오처럼 흐릿해진 불빛 로비에
느닷없는 사람들이 바라보던 티브이 꺼지고
잠자리 찾는 보호자 신문지 구겨지는 소리 피어난다

유료 피씨에서 붕대 두른 소녀가 마우스를 문지르고 ...
9층에서 알게된 남녀 환자들이 끝말 잇기를 한다
머리에 링거 바늘 아가 안은 엄마에게 아빠가
에버랜드 튤립 이야기를 해준다 . 튜브에서
약물이 떨어지는 대로 엄마 가슴에 풀잎 젖는다

하필이면 . 어쩌다가 . 이제와서 ... 낮은 목소리가 지나가고
1종 의료보험과 유부초밥 이야기가 포개져서 들리고 ...
볼빨간 간호사 고무창 굽이 가쁘게 메아리 진다
유리문에 이마 붙인 남자 눈이 봄꽃처럼 붉어진다
기둥을 등진 여자 한숨이 천정에서 방울진다



병원에 밤이 오면 . 응급실 문에서 이미 하루가 시작되고
이밤을 죽여야할 기침소리가 낮은 물결이 된다
아침 회진까지 유보해야할 것들이 덜마른 빨래처럼 침대에
하나씩 매달리고 ... 성긴잠 사이로 시계를 본 눈빛이
허공을 한바퀴 돌아 하얀벽으로 돌아간다

기도만 하던 남자도 잠들고 . 그의 곁으로 다가온
배반의 톱니처럼 심전도 그래프가 넘어간다
아가를 안은 엄마가 입속으로 자장가를 부르고 ...
봄밤 향기가 모르핀계처럼 흘러오고 . 자판기 앞에서
연애질 힘든 수련의가 메시지를 확인한다



소리내어 말못한 이야기 . 부석해진 얼굴
구겨진 종이컵 . 마지막 방울이 묻어있는 튜브
노란 차트 파일 . 급히 싸온 옷가방 ....

병원에 밤이 오면 . 목선들이 잠든 포구
시간을 붙잡아야할 불빛이 쉼없이 반짝이고
손을 맞잡은 파도가 밀리고 밀려온다






2004 . 4 . 3



36 . 탑승장 하이힐 나비


탑승장 대합실 . 선글라스 남자가 여자 하이힐을 벗긴다
장난처럼 남자가 멀어지자 캔을 따듯 코웃음 터진다
난간 - 보이드 - 에스컬레이트 급강하 하면 ...
도착 대합실 자동문 열리면서 노랑 나비 한마리 들어온다

화단 경계석에서 문고판 읽던 여승무원이 문자메시지 받는다
항공사 로고 손수건이 몸서리 치는 그녀 발밑에 떨어진다
착륙 비행기 시간표 판떼기 넘어가고 . 모가지 벌건
남자 포주가 새여자 사진을 들고 난간에 선다

파우더블루 니트 머플러 남자가 어깨를 흔들며 나오자
볼 빨개진 크림 쉬폰 스커트 여자가 입술 깨문다
시큼한 재회 사투리가 인조석 바닥에 뒹굴고 ...
나비가 에스칼레이트 오른쪽 발판에 앉아 상승한다

티킷 플로어 . 워키토키를 아령처럼 거머쥔 여직원이 오분에
한번씩 체인에 힐굽 감긴듯 ... 왼발을 축으로 피벗한다
예약 없는 골프채 남자에게 그녀 난반사 미소로 다가간다
던킨 앞에서 식권 쥔 여승무원이 허릿살에 손 올린다

살찐 여가수의 블루스 허밍하며 그녀 집게를 빙빙 돌린다
양말 바람 홈리스 남자가 항공사별 시간표를 쥐고
발권 창구로 온다 . 데스크 여직원이 어제와 같은 대답하고
홈리스남자 애석한 눈빛으로 고개 떨구고 돌아선다



보이드 홀에 나비가 탑승층으로 날아간다 . 제냐 수트 남자
품에서 훌쩍이던 여자가 뷔스티에 라벨을 손가락으로 뒤집는다
니트모자 휠체어 남자가 오줌 비닐백 안고 헛구역질 한다
하이힐 기다리다 비행기 놓친 여자가 하얗게 질려간다

새여자에게 바람맞은 목 벌건 포주가 맨발 여자에게 다가간다
그가 그녀에게 권해본 달콤한 배반의 캔 위에 나비 앉는다
마지막 출발편이 찍히자 . 비릿한 한숨이 와플 천정에
올라가고 . 이인조 순찰경 배고픈 눈빛 반짝인다



게이트들이 단호히 닫기고 . 명품관 셔터 내려오고
가벼운 엔딩 발라드가 아트리움에 저물어간다
스타벅스앞 기둥에 버려진 하얀 하이힐과
노랑 나비 ... 탑승 계획 없이 잠든다






2004 . 5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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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해로움 없이 나누는 날까지 지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