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밤거리까지

십이야
임애화 영화



선풍기 바람이 펼쳐진 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낯익은 TV 드라마처럼
마감된 사랑에는 대답없는 전화 메시지와 액자 속의 사진 한장이 남는다 .
착각과 집착으로 불 밝히던 열두개의 밤 .
문을 열면 피아노 스윙이 썰물로 밀려 나가던 ............


첫째 밤 . Oh Holy Night !
생일날부터 저주와 동정과 축복의 초침은 돌기 시작했다 .
운명이 그렇듯이 점괘에서부터 모든 전조를 달고 나타났고 빨강 택시의 거울 안으로 그대가 들어왔다 .

모든 시작과 끝은 함께 맞닿아 있어서
언제나 경계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


새 남자 앞에서 옛 남자를 기억하며 10 cc쯤 눈물을 흘렸던 버스 차고 앞 계단 참으로 밤바람에 속삭이듯 허밍이 실려왔다 .

페르시아 고양이가 지켜보던 소극의 두번째 밤이 물결로 지나가고
오페라의 셋째 밤 .
누구나 사랑을 이야기하면 기억되는 밤 . 격렬한 간주와 풍랑이 세진 고속도로 . 타이어가 펑크난 질주 . 그대가 배달해온 아침식사 .

풍랑에 떠밀려온 기슭에서 사방을 둘러보던 네번째 밤 . 그대의 벌레먹은 이빨과 십이지장이 내는 공기가 코끝을 건드리고 지나갔지 . 그리고
리릭 소프라노와 하프의 다섯째 밤 .
대양으로 떠나는 범선의 갈비뼈 아래에는 또다른 항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농익은 내 미소에 그대의 비뚤어진 자조가 뿌리던 차디찬 세례의 말발
여자와 남자는 같지 않아 ....
공항특급 트롤리에서 손가락을 꼽아 선택이란 단어를 되짚어보지만 이미 열차는 미끄러지듯 달려가고 있더군 .

마지막 파티가 시작되기 전의 여섯번째 밤 .
옷장 안의 드레스를 다 꺼내봐도 나는 그대의 선택을 기다리는 마네킹 .
시간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강하던 그대의 말 한마디 . 평범한게 최고야 ....

일곱번째 밤 . 늦은 밤 텅 빈 전철에서 전화해 본 사람은 알거야 .
나란히 늘어선채 흔들리고 있는 손잡이들 사이로 그대의 권태가 메아리치고 낯선 환승역에서 드디어 길을 잃었다는걸 알때쯤 . 플랫폼으로 깊은 터널의 찬 바람이 밀려나오고 이미 돌아갈 전철도 끊어져 있었지 .

아 . 길바닥에 남겨진채 이를 갈고 있던 여덟번째 밤이 다가왔다 .
그대의 랩탑과 새 팬티를 들고 온날 결국 내가 듣게 되는 말 .
난 니가 이성을 가진 인격체인줄 알았어 ......
밤의 끝을 알리는 장엄한 현악이 거리를 뒤덮고 물기먹은 마침표로 돌아왔지 .

이런 밤까지 굳이 계산에 넣는다면 아홉번째 . 한 배럴쯤 눈물을 흘렸고
그대는 종영된 영화 . 쥬스가게에 바닥난 복숭아 . 셔트내린 쇼윈도우 .
전화벨 소리마다 뒤돌아 보던 이런 밤 거리는 놀리듯 청아한 푸른 빛이더군 .

나의 슬픈 세레나데가 그대에게 포근한 자장가로 변주되던 열번째 밤 .
먼나라에서 찾던 그대의 그림자가 유리잔의 식어버린 커피위로 지고 ........
속삭임도 고백도 사라진 채 그대를 안아버린 열한번째 밤 .
텅 빈 식탁위로 변함없이 떨어지던 달 빛 .

열두번째 밤 . 돌아온 피아노 스윙의 잔물결 .
이삿짐을 챙길때 튀어나온 읽다만 책처럼 옛 사랑을 만나자 멀리서 잊혀진 뱃고동이 울리고 거리의 불 빛은 오렌지 빛으로 변했다 . Oh Holy Night !
내 사랑은 시계가 돌아가듯 동그라미의 끝으로 돌아오고 .........
희미한 경계의 기슭으로 물결이 새하얀 거품으로 다가오겠지

다시 밤은 카운터를 초기화하고
그래서 언제나 한번뿐인 사랑이 시작된다 .
첫번째 밤 ....................


2001 . 4. 30
tkhong .  letter@ange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