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취인 불명
김기덕 영화



에미다 . 잘 있었느냐 .
니 아버지한테 영어로 .. 맨날 쓰는 편지 . 우리말로는 처음이구나 .
언젠가 속 시원히 이야기했으면
하면서도 .... 한번도 못해보고
다 .. 지나가고 나서
나는 또 편지를 쓰는구나 ..



우체통 인생이지 ... 좋은날 벌써 지나가고
마을 사람들 손꼬락질 하는데 궂이 빨간 버스 안에서 살던게 ....
우체통 속에서 우체통처럼 살라고 작정한거 아니었겠냐
니 새끼야 .. 이미 다 알고 있었겠지 .

돌아보면 내 배를 거쳐간 놈도 지랄맞게 많았구나 ... 하지만
난 너한테 얻어 맞을때가 최고로 행복한 순간들었지 .
니가 날 실컷 패고나서 ... 옷을 다 벗기고 ... 그 짧은 순간동안 기다리던
뜸이라니 ... 난로에 데워진 물이 양철통에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
잘 생긴 손으로 뽀득뽀득 금이간 몸뚱이를 씻겨주면 ...
버스 창으로 김이 방울져서 내렸었지 .

아들아 .....
에미 인생 . 기억도 안나는 첫 남자의 허연 물이 눈으로 밀려와서
한 쪽 눈 멀고 ... 남은 한눈으로 할 줄 아는건 연애밖에 없었구나 .
한 놈 한놈 떠나고 나서 어느날 밤부터 사타구니에 개새끼 한마리
가둬두고 살기로 했더니 .... 그 꼴 보기 싫다꼬 ... 니가
개장수를 따라 다니다니 .... 다 내 업보지 .

사람들이 내 개를 잡아 묵을라꼬 활 쏘고 총질까지 하더구만 ...
내가 뭐 ... 환장을 했겠냐 ... 겨울이었구나
긴긴밤 . 갈곳 없는 방망이를 곤두세운 ... 염치없는 남정네들
다 마뜩치 않더구나 . 난 니 애비 하나만을 기다렸다 .
사랑도 그리움도 다 말라 비틀어졌지만 ...
너희 부자 서로 얼굴 맞대고 사는 꼬라지 한번 보고 싶어서 .....

내 인생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기다리는것 뿐이었지만 ..
너마저 .... 나처럼 기다리고 산다는게 ... 길고긴 철사줄이 오장육부에
돌돌 말려있는것 같더구나 . 내가 쥑일년이지 ....
살아가는게 다 그렇게 빈 소주병처럼 굴러다니는 거라는거
애즈녁에 알았으면서도 ..... 니 닮은 애비 얼굴 한번 보이고 싶어서 말이다 ....

허옇게 뜨물이 낀 눈구녕 ... 머리칼로 가리고
한 눈으로 본다꼬 세상이 반쪽만 보이는것도 아니더구만 ...
한눈 가리고 걸어온 둑길에 그림자가 반쪽만 지는것도 아니더만 ...
바다 건너 낙원같은 세상에 건너가서 떵떵거리고 살거니 했건만
너마저 눈 하나 멀어서 .... 그렇게 가버리고 말았구나 .

얼마나 세상이 더러웠으면 ... 니가 내 안에 그렇게 머리를 박고
태어난것처럼 떠나간날 .... 유난히 바람이 드세던 그날 낮 .
하늘을 보고 버둥거리던 니 다리와 ....... 내 가랭이 사이
푸릇푸릇 보리밭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였단다 .
우리 모자 아랫도리가 타고 ... 군복이랑 워커가 타고 ....
한미 연합군이 탐내던 내 터럭들이 향불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더구나 .

창국아 . 내 새끼야 ....
니가 가고나니 내겐 아무것도 남은게 없구나 .
이제 ... 우체통도 목욕통도 편지지도 ... 감나무도 까치도 ... 필요없다 .
남은 기름으로 빨간 버스 우체통에 불을 붙였다 .
북쪽에서 부는 바람이 처음으로 따스한 온기를 지펴오고
불길이 한 세월 흘린 눈물을 다 말려가는구나 .
새벽 안개처럼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한쪽눈에 하얀 물도 말라서 ..... 이제야 온전히 보이는데 ...
두 눈으로 다 보니 .... 세상은 온통 불길 뿐이구나 .







추신 .
뒤늦게 부친 이 편지 겨울이 가는
밭에서 누군가 줏거들랑 ...
큰 소리로 읽어주오 ...
나랑 내 아들 ...
이제 저 먼 나라에서
그 소리 듣고 있을거니까 ..



















2001 . 9. 25
tkhong .  letter@ange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