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방에서 긴 회전

고스포드 파크
로버트 알트만 영화





부자는 자동차 뒷자리에서 .... 가난한자의 뒤통수를 바라본다 .
으슬으슬 추운 오후 .... 입김이 떠다니는 온기를 서로 외면하는
부자와 ..... 가난한 자 사이에는
저물어가는 시간과 차가운 비가 기다리고 있다

장원의 대저택 .... 부자의 문에는 차양이 있고 .... 열어주는 하얀손이 있다
가난한 자에게는 모자챙이 있을뿐 ..... 문은 그냥 열려있다 .
부자는 비가 처음 와닿는 지붕 가까이에서 살지만
가난한 자는 빗물이 흘러가는 바닥에 붙어서 산다

부자와 가난한자에게는 나란히 이성보다 기나긴 복도가 있어서 ...
때로는 방을 못찾기도 하고 .... 일부러 다른 방을 택하기도 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는 계단이 있어서
헛디딘 발길들이 얽혀 .... 피없는 비명이 계단골을 타고 울리기도 한다

부자의 식당은 벽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미움과 끌림이 ..... 샹들리에 아래에서 소용돌이 치고 빠져나갈줄 모르지만
가난한 자의 식당은 유리창에 비추어지고 있어서 ....
버림과 껴안음이 마주보이다가 .... 빛의 소멸과함께 사라져버린다

부자의 침실은 상습으로 빈자리에 새벽이 시퍼렇게 멍들지만
가난한 자의 침실은 미지의 곁다리로 붉으죽죽 긴 밤을 넘긴다
부자나 가난한 자에게나 이 거대한 집에 사랑은 남아있지 않지만 ....
누구나 감성이 끄는대로 .... 한바퀴씩 원을 그릴수는 있다 .


한발을 이성의 빛 아래에 두고 다른 발은 본능의 어둠속으로 이동하는
경첩같은 피봇(pivot)은 .... 각자의 방에서부터 작은 파장을 그리기 시작하고
파티방의 피아노에서 .... 스윙리듬을 타고 샴페인빛 동심원으로 파열되고 ...
섹스와 .... 분노가 함께 문턱을 넘나들며 .... 부딪치고 골을 패고 지나간다







서재에세 개를 끼고 사는 개자지의 실내화부터 ...... 회전이 시작되면
부자에게 섹스는 수표 한장 ... 우유 한잔으로 끈적끈적 흔적이 남지만
가난한 자의 섹스는 담배 한모금 몽글몽글 연기가 되어 흩어져버린다

섹스후 .... 부자는 협잡과 위선으로 체액을 닦아내지만
가난한 자에게는 자조의 쪽팔림과 허탈한 동질감의 한방울이 스며든다
섹스를 위해 .... 부자는 턱을 치켜들고 규율을 하나씩 만들어 놓지만
가난한 자는 .... 어두움의 자락에서 방임의 체위 하나만 마련해 놓는다

섹스의 문짝에서 ..... 딸은 찝적임의 경첩이 되고 .... 아빠는 휘두름의 경첩 ..
엄마는 찍어두고 기다리기의 경첩으로 위층에서 일가족이 빙글빙글 돌면
아무 치마자락이나 풍구질하는 미제 경첩과 ..... 아무 바지에게나 ...
접대 경첩이 되는 원만한 엉덩이가 아래층에서 소리없이 돌아간다



부자의 분노는 깨진 토마토 쥬스잔 ... 상처와 얼룩으로 범벅이 되고
가난한 자의 분노는 복도에 떨어지는 빛 .... 바이올린 선율에 다음을 기다린다
부자는 단한번의 카드패로 분노의 파티와 성찬과 잠자리를 흥정하지만 ...
가난한 자는 .... 단한번의 분노로 식어가는 욕조에서 나와 가방을 싸야한다 .

대저택의 정교한 배관을 타고 흐르는 분노는 지하의 집수정에 차 오르고 ...
빅토리아풍 슬기를 지닌 하수 구조는 필연의 역류를 담담하게 진행한다
분노는 때로 눈이 멀어 발을 헛디디기도 하지만 .... 내밀하고 진지하게 얽혀
피아노 선율을 따라 ..... 시작되었던 곳으로 하나씩 돌아오며 ... 회전을 끝낸다


늦은밤 세탁실 ..... 물이 흐르면 껌뻑이는 삽입하나 ... 입을 타고 새나오고
물방울의 속삭임은 짧은 키쓰와 깊은 고백을 거쳐 .... 노회한 복도를 흘러내려
계단 아래방 ..... 차별과 격조에 삶을 유배해둔 하녀장의 무채색 어깨선에 ....
과묵하게 신의를 지키는 선반위 독약병에 ..... 남겨둔 이야기로 잠기어가고 ....

섹스와 적절한 비밀을 시간의 물병에 담으려는 영화쟁이가 수화기를 든다 .
헐리우드발 통신이 회전을 시작하면 .... 형사의 추리소설이 안으로 파장하고
부자도 가난한 자도 되지 못하는 영화쟁이가 현실을 허구로 바꿀 즈음 ....
부자는 휴가를 끝내고 .... 가난한 자는 새출발을 다짐하며 ... 이별한다



주인과 손님이 떠나버린 커다란 집은 소멸의 카타르시스에 빠져들고
서로 다른 파장이 겹치며 패인 골들에 빈 메아리 하나씩 가라앉으면 ...
아래층을 함유하지 못하던 윗층의 파국이 ..... 관성의 무게를 타고 내려와
.... 주방과 세탁실 .... 리넨실과 재봉실의 경첩을 타고 조금씩 줄어들고 ...
가난한 자의 방안으로 긴 회전을 마치고 돌아온다

계단실과 안뜰과 .... 전실들과 알코브들이 침묵으로 식어가는 깊은 밤
언제나 그랬듯이 ..... 남아있는 것들의 여운이 기지개를 피면 .........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되었던
맨 아래층 빈 복도에 .... 단음계의 바이올린 조각이 ....
홀로 ... 공회전한다



2002 . 6 . 3
tkhong .  letter@ange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