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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_mono_03] 엘리베이터는 말이 없다
marisu   2001-04-24 13:48:59, 조회 : 3,902, 추천 : 711

 


엘리베이터는 말이 없다







   




엘리베이터는 말이 없다

21세기 멀티미디어 지식 공학 연구소 그 23층 건물의 엘리베이터.





은회색 거울 입방체의 밀폐된 엘리베이터 공간에서야 그녀는 오히려 온전히 숨쉰다. 이 때, 그녀의 손에는 으레 복사물이나 0.35mm의 샤프펜슬이 들려져 있기 쉽다. 흰 면 소재의 셔츠와 회색 정장을 즐겨 입는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얼굴의 살색과 입술의 분홍빛에 새롭고 야릇한 기분을 느낀다. 그녀가 사실은 얼룩말 무리 중에 섞여 있는 나체의 여신일지도 모른다는 느낌. 유전자에 각인된 프로그래밍에 따라 움직이는 다수의 인공 지능 사이보그들 틈에 섞인 야생의 원시인간이 된 느낌.



가끔씩 22층에서 사람들이 들어오고 16층 정도에서 나가버린다. 또는, 1층에서 탄 방문자들이 10층에서 내린다. 엘리베이터에서 그녀는 오히려 온전히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좀처럼 그토록 가까이 마주하거나 함께 있지 않는 타인들. 어떤 날은 그들 귀 뒤편의 그늘진 부분이나 턱 아랫부분의 옴폭한 혹은 늘어진 살결을 보기도 한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들과 담소를 주고받지 않는다. 그녀는 오직 바라볼 뿐인데, 엘리베이터 동승자들이 위를 바라보며 내릴 층의 숫자를 기다리는 초조한 순간, 그녀는 그들 상의에 올이 풀린 단추나 넥타이의 주름, 막 녹슬기 시작한 귀걸이 따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을 하자,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엘리베이터는 소리를 돋보이게 하는 곳이기도 했다. 기침소리나 침을 삼키는 소리, 숨소리, 종이를 넘기는 소리 등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가장 사실적으로 발현된다.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001 . 3 . 27

윤선아 . marisu  letter@ange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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