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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밑 벤취
lunatree   2001-04-21 00:21:03, 조회 : 4,274, 추천 : 778

 
버드나무 밑 벤치







   




버드나무 밑 벤치





이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이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지금까지 12년 정도를 살아왔다.



아파트 안 상가 옆으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놀이터가 있고,
또 그 놀이터 옆에는 꽤 많은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다.
나무 그늘이 짙고, 버드나무 또한 우람해서 버드나무 밑 벤치는 조금 비밀스런 장소이다.



그곳에 관한 기억이라면,

중학교 때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사주는 감기약을 마셨던 곳이고, 또 그애에게 생일선물을 주었던 곳,

고등학교 때는 고3이던 선배 오빠가 술에 취해 찾아왔을 때 잠깐 얘기를 나눴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학 때, 남자친구가 괴로워하는 나한테 담배 한개비를 권했던 곳...

처음 빨아들인 담배 연기는 울먹이던 내 가슴을 한바퀴 돌고 오감을 뚜렷하게 만들었다.
버드나무 주위에는 귀신들이 많이 모인다는 얘기도 나눴다.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들이 산발한 머리와 비슷해서일지 모른다며..



가끔 그 나무 밑에 가 앉고 싶을 때가 있다.

뭔가 울적해질 때, 그곳은 담배 한 개비를 태우기에 가장 좋은 장소인 것 같다.

가로등 불빛에 나뭇잎 그림자들이 살짝살짝 흔들리고

빼곡히 불켜진 아파트 창들을 올려보면, 바람이 한 줄기 휘 지나간다.



가끔 옆 길로 저녁 산책을 나온 부부가 천천히 걸음을 아끼며 지나고,

몰려다니며 놀 궁리를 하는 아이들 무리가 한바탕 시끄럽게 하기도 하지만,

모든 소음을 조용히 엿들으며 어둠 속에 묻혀있는 동안,

내가 꼭 그곳에 깊게 뿌리박은 버드나무가 된 것 같다.



언젠가 버드나무 밑 벤치에 뜯어진 종이 상자가 놓여있었다.

어느 홈리스가 하룻밤 잠자리로 묵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벤치에 누워 보았을 풍경이 그려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 많은 버드나무 가지들,

그 사이로 보이는 도시의 밤 하늘,

그 밤하늘을 둘러싸고 있는 두 동의 아파트 건물,

한 층에 여섯 집씩 십여층을 이루고 있는 노란불빛의 창문들,

가끔 새어나오기도 하는 그 안의 목소리들, 텔레비전 소리, 그릇 달그락 거리는 소리,



그는 그곳의 버드나무가 되어 그것들에 귀 기울였는지,

아니면 그런 소리들은 아예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냥 바람에 흔들리는 한 그루 버드나무라면...




2001 . 3 . 26

윤 화진 . lunatree .  letter@ange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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