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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걷는 남자가 말했다
guajira  2011-09-24 14:42:48, 조회 : 3,346, 추천 : 1109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시가 날 찾아왔다

“네루다처럼 시가 너에게 찾아온거야  
시는 감당할 수 없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가는 거니까
시가 너를 선택한거야 잊지마”
“왜 하필 나한테 찾아와요?”
“어리석은 질문이군 . 굳이 대답하자면 너밖에 없기 때문이야”


        
까만 터틀넥 남자는 접시에 남아있던 구름 무스케익 반조각을
먹었다 마치 창공에서 구름을 먹어치우는 괴물처럼
먹었다 . 9월 오후의 푸른하늘처럼 먹었다
믿음의 돌풍 같은 남자였다 . 그를 믿지 않는다면
회호리바람에 말려 지상에서 사라질 것 같았다
마마보이 스토커는 왠만해선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았지만
다이빙하듯 쉽게 빠져들기도 했다



“아저씨가 누구신지 알고싶어요”
“나는 이 빵집 구름 무스케익이랑 황혼 퍼지케익을 좋아해
사람들이 나를 조용히걷는남자 란이라고 부르지”
“아저씨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보여요”
“아니야 . 오케스트라로 말하자면 나는 음향 디자이너쯤 되겠지
소리의 미래를 계획하지만 소리를 만들지는 않는 사람
소리가 나오기 이전부터 소리를 느껴야 하는 사람”
“시인 같아요 여자가 옷을 벗는 소리를 에감한 시인처럼 말이에요”


        
“바람의 친구처럼 너도 느낌의 소리를 들을거야
너는 다른 사람처럼 선을 긋거나 영역을 만들며 살지 못할거야
너에게는 선이 사라져버렸어 시가 널 찾아온 순간부터”
스토커는 어깨를 움추렸다 . 무섭다 뭐가 사라지다니  
“저는 단지 시 한편을 좋아했을 뿐인데요”
“두려워하지마 너한텐 시가 있잖아”
조용히걷는남자 란은 구름무스케익처럼 공허하게 끌어당기는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넌 편지를 받을거야”


        
편지라니 . 말을 씹어볼 틈도 없이 조용히걷는남자 란은
기절할 만큼 고요히 사라졌다 .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모든 소리들이 벽 너머로 빨려들어간 듯한 순간이었다
소리의 진공 상태에 의식의 공복이 뒤따랐다  
현기증이 왔다 . 까만 터틀넥 남자를 만나긴 한 것일까
스토커는 구름 무스케익 백원어치를 9월의 푸른하늘처럼 먹어보려
하였다 . 식도을 메워갈수록 환장하게 출출했다



중3 스토커가 변했다 고입 공부는 팽개치고 시집을 끼고 살았다
네루다처럼 김광균처럼 시를 써보려고 하였고 손가락을
물어뜯어 피딱지를 남긴채 잠이 들곤 하였다

그 불길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다

원고지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으리라 다짐하다가
재능에 복수하듯 자위하며 정액을 원고지에 쏟곤 하였다
무소득의 밤들은 아니었다 . 라면과 커피를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먹게 되었다 . 소리내지 않고 걷는 연습을 하느라
점점 고양이를 닮아갔다 . 원고지를 할퀴기도 했다



그리고 한통의 편지가         
스토커에게 왔다 시월의 따스한 날이었다



ps. 인용 시는 파블로네루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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